‘투로’ 기공+춤, 파킨슨병 환자에 희망을 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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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환자임을 포기하고 싶다’.

위경락을 조절하는 동작

자살을 암시하는 어느 파킨슨병 환자의 절규다. 손발이 떨리면서 보폭이 좁아져 종종걸음을 치고, 사람과 가볍게 부딪쳐도 길에 나뒹군다. 동작이 굼떠 단추 하나 혼자 채울 수가 없고, 눈 깜박임이나 미소 짓는 것조차 힘들어 얼굴은 데스마스크가 된다. 증상이 심하면 아예 움직이지도 못하는 무동증으로 목석이 된다. 언어장애·침 흘림·배뇨장애·우울·대인 기피… 파킨슨병 환자로 살아가는 것이 천형과 같다는 표현은 과장이 아니다. 불행한 것은 아직 확실한 치료법이 없다는 것. 도파민·항콜린성 약물을 쓰거나 수술을 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치료의 목표는 질병의 진행을 늦추거나 증상을 완화하는 데 있다.

경희대 침구경락과학연구센터 이화진 연구원은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대학에서 무용을 전공하면서 한의대생들과 기공 동아리 활동을 할 정도로 전통의학에 관심이 높았다. 그는 1998년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치고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갔다. 무용 전문학교인 무도학원에서 1년간 소수민족의 춤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춤의 원시성을 찾기 위해서라는 것이 그의 설명.

“과거의 춤은 ‘무의(舞醫)’라는 말이 있듯 주술적인 치료 기능을 했죠. 지금은 표현 예술로 발전했지만 원류를 찾아가면 아픈 사람을 위해 춤이 존재했습니다.”

그에게 늘 화두가 됐던 것은 ‘춤을 어떻게 하면 환자에게 응용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활로를 열어준 곳이 현재 소속돼 있는 침구경락과학연구센터(소장 이혜정 경혈학 교수)다. 이곳에서 기공과 무용을 결합, 동작이 불편한 환자를 위한 운동요법 개발에 참여하게 된 것. 이혜정 소장은 개발의 동기를 이렇게 말한다.

“한방의 원리는 조기치신(調氣治神)입니다. 기를 조절해 몸과 정신을 치유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존의 태극권과 같은 기공 수련은 몸이 불편한 파킨슨병 환자에게 적용하기엔 무리가 따랐습니다.” 기공을 바탕으로 운동장애가 있는 환자들이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운동요법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때마침 경혈학교실의 박히준 교수가 국제적 저널인 ‘프로테오믹스’에 발표한 논문이 지원군이 됐다. 침으로 경혈을 자극한 결과, 파킨슨병의 증상이 크게 개선됐다는 내용이다.

파킨슨병 환자를 위한 동작요법은 크게 두 가지를 염두에 두고 개발됐다. 하나는 소(小)근육 위주로, 안 쓰는 근육을 많이 사용하도록 했다. 떨림·경직 등으로 생활이 불편한 환자의 기능 개선을 위해서다.

또 하나는 경락을 자극, 기혈의 원활한 순환을 유도했다. 음양의 조화와 신체 오장육부의 균형을 도모하자는 것. 근력과 유연성은 물론 균형감각·의식·호흡까지 조화롭게 활용하는 ‘종합 선물세트’ 같은 운동요법이다. 이화진 연구원은 “예컨대 양릉천(무릎 바깥쪽 약간 아래 움푹 파인 곳)의 경우 동물실험 결과 뇌신경을 보호하는 효과가 나타났다”며 “이렇게 기공을 통해 혈 자리를 지압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동작은 크게 3단계로 구성된다. 1단계는 앉아서 진행된다. 경직된 신체를 이완하는 준비단계를 거쳐 경락을 풀어준다. 모든 동작은 느리고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이어진다.

2단계는 ‘경락 순환시키기’다. 폐경·삼음경·위경 등 사지의 경락과 담·위 등 육부의 기능을 강화한다.

3단계는 ‘경락 안정시키기’. 이미 발동된 기를 가라앉혀 거둬들인다는 의미. 얼굴 문지르기, 어금니 부딪히기, 전신 두드리기 등의 동작으로 구성된다. 이렇게 3단계 동작을 진행하는 데 10분에서 15분 정도 소요된다.

연구팀은 기공 프로그램의 이름을 TURO (套路·투로)로 정했다. 이미 있어 왔던 길을 의미하는 단어로, 흐름(기)을 따라 몸을 자연적인 상태로 되돌린다는 의미다.

흥미로운 것은 실제 환자를 대상으로 한 임상시험에서 확실한 치료 개선 효과를 나타냈다는 점이다. 지난 6월부터 8주간(주 2회) 25명의 파킨슨병 환자에게 약물 치료와 병행해 투로를 진행한 결과, UPDRS(파킨슨병 장애 척도), PDQL(삶의 질 평가지표)가 모두 좋아진 것이다(일상생활 능력과 운동기능, 전체 값이 각각 -0.2, -0.9, -6.2로 참가자의 64%에서 향상됐고, 전신증상·사회기능·전체 값도 각각 1.4, 0.5, 1.8로 개선). 반면 약물만 투여한 군은 오히려 악화된 양상을 보였다.

이혜정 교수는 “의료의 패러다임이 음악·무용·기공 등 다양한 주변 학문과 접목해 환자에게 서비스되고 있다”며 “뇌졸중 후유증과 같은 운동장애 환자들에게도 기공과 무용을 결합한 새로운 운동요법을 개발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이화진 연구원은 이 내용을 담은 논문으로 박사학위 취득을 눈앞에 두고 있다.

고종관 기자


경희대 침구경락과학연구센터 이화진 연구원이 보여준 투로 동작(1단계)과 효과

1 | 호흡하기 ① 반가부좌로 앉아 의식은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을 따라 단전에 머물도록 한다. ② 에너지 대사를 높여 기혈순환을 돕고, 부교감신경을 활성화해 심신의 안정을 유도한다.

2 | 발 경락 풀기 ① 숨을 들이쉬면서 엄지발가락을 몸쪽으로 당기고, 내쉬며 반대로 밀어낸다. ② 족소음 신경과 족태음 비경을 자극, 신기(腎氣)를 보충하고, 소화기능을 강화한다.

3 | 발바닥 경락풀기 ① 호흡을 내쉬며 상체를 앞으로 숙인다. 이때 엄지손가락으로 양 발바닥의 용천혈을 자극한다. ② 무기력증이나 근육이 뭉치고 경직된 증상에 도움을 준다.

4 | 손 경락 풀기 ① 어깨·팔꿈치·목 관절을 이완시킨 뒤 숨을 들이쉬면서 새끼손가락부터 차례로 감아 주먹을 쥔다. 다음으로 손목을 돌려 감았던 순서 반대로 손가락을 푼다. ② 손의 떨림 현상을 완화하는 동작으로 손가락의 소근육을 강화시킨다.

5 | 팔 경락 풀기 ① 숨을 들이쉬면서 합장한다. 숨을 내쉬면서 양손 끝부터 앞으로 쭉 뻗는다. 다시 합장하고, 내쉬면서 뒤쪽 아래로 팔을 뻗어 준다. ② 폐 경락을 자극해 기의 오르내림을 원활히 한다. 팔 동작은 소화기와 순환기, 배설 기능을 향상시킨다.

6 | 담경 자극하기 ① 숨을 들이쉬면서 오른손은 손바닥이 위를 향하게 들고, 왼손은 아래로 내린다. 내쉬면서 들어올린 손을 반대 방향으로 밀듯이 내려 옆구리와 겨드랑를 이완한다. ② 스트레스와 같은 심리 증상을 완화한다.

7 | 목 경락 풀기 ① 양손을 깍지 껴 목 뒤에 대고, 팔꿈치를 옆으로 벌린다. 팔꿈치를 모으면서 뒷목을 앞으로 숙인다. 다음 반대쪽 귀를 잡고 목을 옆으로 당겨 이완한다. ② 경추 7마디가 모두 자극되 며, 어깨 부위의 등세모근도 동시에 자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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