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의 북한… 지금 변화중] 3. 농업에 부는 새바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옥수수 박사' 김순권(金順權.경북대)교수는 지난해 1월 북한 농업과학원 관계자들의 한마디 말에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들이 "1평당 강냉이 16개를 심겠다" 는 말을 먼저 꺼냈기 때문이다. '1평〓20개' 라는 옥수수 밀식(密植)농법은 김일성(金日成)주석의 교시여서 그 누구도 깨뜨리기 어려운 성역이었지만 지금은 이것마저 변화를 겪고 있다. 농업 실용주의는 곳곳에서 감지된다.

북한은 지난 몇년간 金주석이 창안한 주체농법의 '적지적작(適地適作) 적기적작(適期適作)' 슬로건은 그대로 두면서도 농민들에게 품종 선택의 재량권을 부여하는 변화를 추진하고 있다.

주곡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옥수수 농사에 대한 과도한 집착에서 벗어나 감자농사의 중요성이 새삼 강조되고 있고 농민의 생산의욕을 높이려는 인센티브 확대책도 나타나고 있다.

극심한 식량난으로 아사자(餓死者)까지 발생하자 김정일(金正日)총비서는 1996년부터 농업개혁에 손대기 시작했다. '농사는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 이라는 해묵은 구호까지 끄집어내면서 농민 우대책을 적극 고려하게 된 것이다. '

협동농장의 말단조직인 '분조(分組)' 관리제의 틀은 유지하면서도 실제 내용은 바꿨다. 4년 전부터 각지의 협동농장에서는 분조 규모를 10~25명에서 7~8명으로 축소하고 분조의 생산계획치를 하향 조정하는 현실감을 보였다.

또 계획초과 달성분에 대해서는 분조가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도록 개선했다. 일부 지역에선 중국이 80년대 농업개혁을 전개하면서 채용한 '가족생산책임제' 와 유사한 가족영농이 등장하기도 했다.

중국 선양(瀋陽)주재 북한 영사 김학철은 지난 21일 중국 길림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계획을 완수한 뒤 초과부분 생산물은 분조 내에서 자체로 분배할 수 있도록 조정했다" 고 확인했다.

북한 당국자가 농민에 대한 인센티브 제공을 외부에 공개할 정도로 상황은 바뀌고 있다. '물질적 인센티브 제공과 관련, 개정헌법(98년 9월)에서 '개인소유' 를 확대하는 조치도 나왔다.

요즘 북한 농정당국이 주력하는 것은 감자농사와 이모작이다. 양강도 대홍단군에서 시범적으로 시작한 감자농사가 꽤 성과를 거둬 산간지역 어디서나 감자농사로 분주하다.

지난 3일 노동신문은 '감자농사 혁명은 나라의 강성부흥을 위한 중대한 사업' 이라는 제하에 金총비서의 감자농사혁명 관련 어록을 집중 편집했다. 그는 "감자는 흰쌀과 같다" "감자농사를 잘하면 식량문제도 풀고 고기문제도 풀 수 있다" 면서 "앞으로 북쪽지대에서는 무조건 감자농사로 전환하도록 해야 한다" 고 강력히 지시했다. 옥수수 농사에 지나치게 집착했던 과거에 대한 때늦은 후회를 읽을 수 있다.

북한 농업연구기관들은 종자개량에 열중하며 화학비료 부족난을 해결하기 위해 미생물 복합비료 개발에도 힘을 쏟고 있다. 주민들에게 단백질을 공급하기 위한 양어장만도 3백24개나 새로 건설됐다. 그뿐 아니다. 산자락에 계단식으로 만들었던 다락밭도 바뀌고 있다.

홍수로 인한 토사유출을 막기 위해 다락밭 허리에 나무를 심는 사방공사가 도처에서 진행되고 있다. 지력(地力)을 높이기 위해 옥수수밭 중간에 콩을 심는다. 잇따른 수재로 난리를 겪고 난 뒤에야 농정의 타성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농업변화에서 강원도와 평북 지역의 대규모 농지정리도 빼놓을 수 없다. 지난 18일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은 金총비서가 1월 24일과 27일에 평북 지역 토지정리사업을 현지 지도하면서 농업일꾼들에게 지시한 내용을 상세히 공개했다.

그는 마무리된 강원.평북 농지정리에 이어 앞으로도 황해남도 농지정리에 군부대, 평남 개천-태성호 관개공사에는 공병부대를 각각 투입할 뜻을 밝혔다. 북한의 국책사업인 농지정리는 계속 확대할 전망이다.

지난 한해 농사에 애쓴 결과 식량사정은 다소 나아진 것 같다. 북한 농업성 김영숙 부상은 지난해 11월 곡물 생산량이 4백28만t(조곡기준)이라고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 보고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밝힌 북한 식량 수요량 6백30만t에 비하면 올해도 2백만t은 부족하지만 회복세에 들어간 것은 사실이다.

농업생산이 회복세로 돌아섰다고는 하지만 농업기반이 워낙 취약해 외부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김운근(金□根)박사는 "농업 개혁을 위해서는 종자.비료.원자재.산림녹화.영농기술 등 대규모 남북농업 협력이 필요하다" 고 지적했다.

특별취재반〓유영구.최원기.정창현.이영종 기자

◇ 의견.문의.관계기사 열람은 e-메일 , 팩스 02-751-5171, 조인스닷컴 홈페이지(http://www. joins. com)의 '남북 정상회담' 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