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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살리기? 재활용은 편하고 멋있고 즐겁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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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호 02면

1 버려진 전기밥솥의 내솥 안쪽을 잘라내 아기 캐리어를 만들었다. 2 플라스틱 의자를 뒤집어 만든 그네. 3 자투리목재를 덧대 식당 문짝을 리폼했다. 식당이라는 공간을 상징하기 위해 밥그릇과 수저를 오브제로 이용했다. 4 못쓰게 된 책상 서랍을 벽에 달아 열쇠함으로 활용한다.

“내가 재활용 작업을 많이 하니까 지구를 지키기 위한 사명감이라도 있는 줄 아는데 그런 거 없어요. 게으름뱅이의 만들기 전략일 뿐이죠.”

한국 - 연정태 ‘아름다운 자연학교’ 교장

연정태(49ㆍ경기도 양평 ‘아름다운 자연학교’ 교장ㆍ사진)씨의 ‘재활용론’은 독특했다. “재활용 작업이야말로 물건을 가장 쉽게 만드는 방법”이라는 주장이다. 누군가 만들어 놓은 물건, 그 속의 재료와 디자인을 거저 가져다가 내가 의도한 물건을 만들 수 있으니 그렇단다. “버려진 물건 안에 이미 형태를 갖고 있거나 부품으로 존재하는 것들을 그대로 가져다 활용하는 얌체 같은 전략”이란 표현까지 썼다.

1 영국 런던에 있는 옷가게‘리사이클링 포 더 퓨처’ 매장. 2 안 쓰는 와이셔츠를 모아 만든 드레스. 3 양복 소매만 잘라 만든 원피스.

연씨의 생활공간은 그렇게 ‘쉽게’ 만든 재활용품으로 가득하다. 늦둥이 아들 오랑(5)의 그네는 플라스틱 의자를 뒤집어 만들었다. 네 개의 다리 중 하나를 잘라낸 뒤 방석을 깔아 탑승 부분을 만들었고, 안 쓰는 허리띠를 달아 안전띠로 활용했다. 아이를 태우고 달릴 수 있는 자전거 트레일러는 망가진 수동 골프카트와 아기용 플라스틱 흔들말을 자전거에 연결해 만들었다. 아내의 부탁으로 만든 화장대 역시 재활용품이다. 주워온 나무의자 두 개의 다리를 모두 잘라낸 뒤 남은 부분을 이어 붙여 완성했다. 의자의 휘어진 등받이 부분이 화장대의 멋스러운 다리로 변신하는 순간. 연씨는 “나무를 잘라 화장대를 새로 만들었다면 절대 이렇게 우아한 다리로 못 만들었을 것”이라며 흡족해했다.

대학에서 지리학을 전공한 그는 1980년대 노동운동을 위해 3년간 공장에 위장취업을 하면서 기계와 가까워졌다. 처음 접한 용접ㆍ밀링ㆍ선반 등이 너무나 재미있었단다. 타고난 장인이었던 셈이다. 그 뒤 그는 제품 디자이너로 생업을 이었다.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는 작업에 재활용 아이디어는 늘 큰 도움이 됐다. 가령 이런 식이다. 그가 100일 된 아들을 안고 산에 올랐을 때다. 처음에야 가뿐한 마음으로 아이를 안았는데 나중엔 팔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고 했다. 아이 안은 팔을 받쳐놓을 받침대만 있었더라면…. 집에 돌아오자마자 그는 재활용품을 모아놓은 창고를 뒤졌다.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물건이 전기밥솥 내솥. 적당한 각도와 곡선ㆍ강도 등이 ‘이거다’ 싶었다. 그는 솥을 ㄴ자 모양으로 잘라낸 뒤 한쪽 면을 허리띠 안에 꽂았다. 그리고 몸 밖으로 돌출돼 나온 다른 한쪽 면에 팔을 올려놓고 아이를 안았다. 한결 편했다. 세상에서 가장 간단한 아기 캐리어가 완성된 순간이다. 그는 현재 이 제품의 특허를 내둔 상태다.

5 짐볼에 지도를 그려넣어 지구본을 만들었다. 6 버려진 의자(오른쪽) 두 개로 이어붙여 만든 화장대.

그가 본격적으로 재활용 디자이너로 이름을 알리게 된 건 2004년부터 올봄까지 아름다운가게의 ‘아름다운 공방’ 간사로 활동하면서다. 버려진 물건으로 생활도구를 만드는 작업을 주로 했다. 아름다운가게 서울 안국동 본부 옥상에 세운 페트병 기와집도 그의 아이디어에서 나왔다. 1.5L 게토레이병 1000개를 잘라 기와로 활용했다. 몇 년씩 비바람과 햇빛에 방치돼도 그 형태와 물성이 변하지 않는 페트병의 특성이 지붕재로 안성맞춤이었다. 그 밖에 폐기된 합판으로 만든 조립식 책장, LP가스통으로 만든 바비큐그릴, 자투리 파이프로 만든 신발건조대 등이 그의 작품이다. 최근엔 그 매뉴얼을 담은 책 『물건의 재구성』(리더스하우스)도 출간했다.

그는 재활용 여부를 떠나 만들기라는 작업 자체의 가치를 높이 친다. 기업이 팔기 위해 만든 물건에 익숙해져 버리면 물건의 본질을 못 보게 된다는 게 그의 철학이다. “만들어 보지 않으면 그 물건이 좋은 물건인지 아닌지 판단을 못 해요. 겉치장에만 솔깃해지게 마련이죠.” 그는 “직접 만들어 쓰다 보면 자연스럽게 재활용의 가치도 알게 될 것”이라고 장담한다. 그래서 그는 일단 사람들에게 만드는 재미를 알려주는 데 주력할 계획이다. 내년부터 아름다운자연학교에 주말 프로그램을 정례화해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만들기 체험의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드릴과 직소 다루는 것 어렵지 않아요. 일단 접해보면 다들 재미있어 하죠. 우린 다 호모 파베르(Homo Faber·도구를 쓰는 인간)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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