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철한 "나는 아직 배고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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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는 못 속이나’
조훈현9단(左)이 최철한9단과의 대국에서 기본 사활을 착각해 판의 절반이나 되는 대마를 잡힌 뒤 복기하고 있다. 가운데는 이세돌9단.[사이버오로 제공]

최철한(사진) 9단이 고삐 풀린 말처럼 바둑판 361로를 휘젓고 있다. 도쿄.중국.서울.타이베이를 숨가쁘게 오가며 무서운 기세로 정복에 나서고 있다. 최철한은 47승17패로 국내 프로기사 중 다승 1위. 국내 타이틀에선 국수.기성.천원까지 3관왕에 올라 역시 3관왕인 이창호9단과 호각를 이루고 있다.

세계무대에선 도쿄의 도요타 덴소배에선 4강에서 탈락했으나 지난 10일 열린 중국의 응씨배에선 당당 결승에 진출, 창하오(常昊.중국)9단과 한판 승부를 앞두고 있다. 세계정복에 나선 첫해에 눈부신 전과를 거둔 최철한 앞에 드디어 정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최철한은 응씨배를 끝내자마자 중국에서 돌아와 13일 국내 최대기전인 전자랜드배 왕중왕전 8강전에서 조훈현9단과 맞섰다. 난전이 이어지며 승부는 일진일퇴를 반복했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 조훈현의 착각이 등장했고 어마어마한 대마가 죽어버렸다. 아마도 올해 잡힌 대마 중 최대가 아닐까 싶다.

최철한의 전자랜드배 4강 진출은 이창호와의 국내 영토전쟁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국내 공식대회는 모두 8개. 이 중 6개를 이창호와 최철한이 3대3으로 나눠 갖고 있다. 나머지는 KBS 바둑왕전과 전자랜드배. 이창호가 KBS 바둑왕전 결승에 오르며(상대는 조한승8단) 기선을 잡은 듯 보였는데 곧이어 최철한이 전자랜드배 4강에 나섬으로써 국내 판도는 다시금 팽팽해졌다.

전자랜드배에서 이창호는 천적(?)인 여성기사 루이나이웨이9단에게 져 탈락했다. 4강전은 최철한 대 김성룡8단, 김주호4단 대 송태곤7단-김찬우3단의 승자가 맞서게 된다.

13일 전자랜드배를 둔 최철한은 그 다음날 대만으로 떠났다. 16일 시작되는 중환배 세계대회에 출전하기 위해서다. 중국의 구이양(貴陽)에서 서울로, 다시 대만으로 동분서주하는 최철한의 모습에서 왕년의 이창호가 느껴진다. 무쇠 체력을 지닌 이창호는 한때 '연간 90승'이란 경이적인 기록을 세워 "과도한 대국이 바둑 수명을 단축시킬 수 있다"는 우려를 자아내기도 했다.

이창호가 어렸을 때 전국 우량아대회에서 2등을 한 일은 널리 알려진 얘기다. 만19세로 이창호보다 열살 어린 최철한도 어려서 우량아였다. 그 덕분인지 공항에서 직행해 대국하는 식의 강행군을 잘 소화해내고 있다.

국제대회 기록으로 보면 이창호는 이미 20승을 거둔 사람이다. 지난 시즌만 해도 응씨배.LG배.도요타 덴소배.춘란배 등 4개 대회에서 우승했다. 또 경쟁자인 이세돌9단도 세계대회 2승, 뒤를 쫓아오는 박영훈9단도 올해 후지쓰배에서 우승했다. 이에 비하면 최철한은 우승 경력이 없고 이제 겨우 응씨배에서 결승에 진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둑계는 최철한을 주목하고 있다. '독사'라는 별명을 지닌 최철한의 끈기와 승부근성, 그리고 올해 최철한이 이창호를 상대로 두개의 타이틀을 따냈다는 사실에 높은 점수를 주고 있다.

박치문 전문기자

<하이라이트>

◆ 조훈현, 오궁도화(五宮桃花)를 못 보다=직사궁과 곡사궁은 살지만 오궁도화나 매화육궁은 죽는다. 오궁도화는 5개의 궁도가 복사꽃 같아서 붙은 이름으로 초보자도 아는 유명한 죽음의 상징이다. 그런데 프로생활 40여년 동안 산전수전 다 겪은 조훈현9단이 13일 최철한9단과의 전자랜드배 8강전에서 오궁도화를 못 보고 대마를 죽여버렸다. 역시 나이는 못 속이는 것일까.

흑을 쥔 조9단이 1로 끊어 왼쪽 백 대마를 먼저 잡았다. 백이 2로 흑대마를 차단해 올 때 조9단은 3을 선수하고 A로 연결하려 했다. 그러나 백은 넉점을 잇지 않고 4로 차단했다. 5로 끊어 곡사궁인가. 아니다. 6의 자살수가 놓이자 오궁도화가 됐다. 돌 수만 무려 38개의 대마가 죽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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