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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막후의 또 다른 전쟁 … 치열했던 포로 송환 협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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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한국 내 포로수용소에서 서로 다른 복장으로구분했던 포로들. 왼쪽부터 북한군·중국군·반공포로.(『한국전쟁』·책과함께)

1952년 12월 3일 유엔총회에서 인도 정부가 제안한 포로 문제에 대한 결의안이 통과됐다. 결의안은 모든 포로의 송환과 석방은 1949년의 제네바 협약에 따라야 하며, 포로 송환을 실시 또는 방해하기 위해 강제력이 사용돼서는 안 되며, 송환을 원하지 않는 포로는 중립지대에 이송해 심사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공산군 측은 이 방안을 수용하지 않았으나 이듬해 3월 30일 저우언라이가 유엔 결의안과 유사한 내용의 제안을 하면서 53년 6월 8일 포로 교환에 대한 합의가 이뤄졌다.

우리에게는 50년 6월 25일부터 이듬해 1·4 후퇴까지 초기의 치열한 공방전의 기억이 주로 남아 있지만, 한국전쟁에서 가장 논란이 되었던 것은 포로 교환 문제였다. 51년 7월 개성에서 시작돼 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2년 동안 정전을 위한 협상이 진행되었는데, 이 중 18개월 동안 포로 문제로 인해 휴회와 속개를 거듭했다. 전쟁의 3분의 1은 포로 송환을 둘러싼 논쟁 기간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제네바 협약에서는 전쟁이 끝나는 즉시 모든 포로를 ‘무조건’ 송환한다고 규정했는데, 공산군 포로들 중 송환을 원하지 않는 포로가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51년 말 유엔군 조사에 따르면 전체 16만 명의 포로 중 과반수가 북한이나 중국으로의 송환을 거부하고, 남한에 남거나 타이완으로 갈 것을 희망했다. 38선 이남 점령 시 청년들을 강제로 인민군에 편입시켰던 북한으로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지만, ‘자원’에 의한 인민지원군을 파견했다고 주장해 온 중국에게는 큰 타격이 되는 것이었다. 중국군에는 과거 국민당 소속 군인들이 포함돼 있었던 것이다.

결국 정전협정 체결 후 비무장 지대에서 인도군의 감시 하에 송환을 거부하는 공산군 포로(2만2604명)와 유엔군 포로(359명)에 대한 심사가 진행됐지만, 논란 끝에 대부분의 포로들이 송환되지 않고 민간인 신분으로 석방됐다. 그러나 이 중 88명(공산군 86명, 한국군 2명)은 어느 쪽으로도 가지 않겠다고 선언, 인도로 갔다. 이 중 69명은 남미에, 5명은 인도에 정착했으며, 8명은 북한과 중국으로 돌아갔다.

중립국으로 간 포로 문제는 ‘광장’(최인훈)과 ‘시간의 저편’(한수산) 등의 소설과 영화 ‘JSA’의 이영애를 통해 재현됐고, 반공포로 문제는 ‘흑수선’(배창호)으로 영상화되기도 했다. 또한 현재까지도 북한에 억류된 한국군 포로의 송환 문제는 이산가족 상봉 때마다 쟁점이 되고 있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한국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