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 약속은 지켜져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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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총선이 끝났다. 여진은 있지만 연초부터 한국 사회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던 16대 국회의원을 뽑는 정치행사가 막을 내린 것이다.

여야는 의석 분포의 득실을 따지며 정국의 주도권을 잡을 궁리에 몰두하고 있다. 발전적 해체 수순을 밟고 있는 총선시민연대는 낙선.낙천운동의 성과가 진정한 정치개혁으로 이어지도록 새로운 형태의 연대를 모색하고 있다.

당선자들은 지지를 보낸 유권자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기에 여념이 없다. 낙선자들은 금배지는 달지 못했지만 후일을 기약하며 끊임없는 성원을 당부하고 있다. 길거리에 선거 벽보는 사라지고 당선사례 플래카드가 나부끼고 있다.

여러가지 가운데 한 386세대 당선자가 내건 "여러분과 약속! 꼭 지키겠습니다" 는 문구가 가장 눈에 띈다. 글귀대로라면 4.13은 과거완료형이 아니고 분명 현재진행형이다.

선거운동 과정과 결과를 보면 역대 선거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지역감정과 흑색선전, 금전살포, 관권개입, 참정권 포기, 일부 시민단체의 초법적 선거운동 관여 등이 두드러졌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이로 인한 엄청난 손실과 후유증.갈등을 보전하고 치유하고 해소하는 지름길은 없는 걸까. 평범하지만 따르기에는 어려움이 적잖을 묘책을 생각해 볼 수는 있다.

우선 선거운동 중 국민들에게 제시한 공약을 현실화하는 일이다. 공약의 사전적 의미는 사회에 대해 약속하는 일이다.

약속은 어떠한 일에 관해 미리 정하고 장차 변하지 않을 것을 서로 맹세함을 뜻한다. 결국 공약은 정당과 의원들이 주민 한명 한명을 상대로 한 '사약(私約)' 이라 할 만하다.

개인 사이의 약속이 지켜져야만 사회는 존재한다. 따라서 표를 얻기 위해 얼토당토않은 사안이라도 비슷한 정책으로 개발해내는 성의가 필요하다. 공약이 여의도로 가려는 말치레 방편으로 악용될 수는 없다.

약속을 메운다는 말이 있다. 약속을 형식적으로만 이행하는 것을 지칭한다. 남북 정상회담 개최는 대통령이 연초부터 언급해온 대표적인 공약이라 할 수 있다.

총선에서 안정적인 의석을 확보하면 남북 정상회담을 북한측에 제의한다는 내용이다. 이 공약은 투표를 사흘 앞둔 시점에서 가시화됨으로써 신북풍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목표를 초과 달성했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여야의 공약 준수 실적이 이와 같을 수는 없을지라도 장밋빛에 불과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쓰지는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국민들도 눈을 부릅뜨고 공약이 메워지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된다. 선거에서 출마자들을 재단한 잣대로 병역과 납세실적.전과유무.과거행적.부정부패를 손꼽을 수 있다.

다음 선거에서는 공약을 시행하는 과정인 의정활동과 공약 완성률을 추가하고 평가의 가중치를 높여야 한다. 공약을 표 얻기용으로 써먹고 거들떠도 보지 않은 정치인은 낙선운동의 대상이 돼야 한다.

다음은 과거 선거 때보다 월등하게 많은 선거법 위반 사범을 엄중하고 공명정대하게 사법처리하는 일이다. 선거기간 중 중앙선관위와 대검.대법원은 선거사범을 신속하게 수사.재판한다는 방침을 연거푸 천명한 바 있다.

그래서 불법.탈법을 저지르고 당선되면 그만이라는 의식을 뿌리뽑겠다는 국가기관의 분명한 의지를 모두는 주시하고 있다. 이 약속도 집행하는 절차만 남아 있다.

벌써부터 야당은 여당이 여소야대 현상을 깨기 위해 선거사범 수사를 적절하게 사용할 것이라는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선거 전에 여당이 원내 제1당이 되면 검찰 편하리라는 우스개가 나돈 적이 있다. 여당이 다수의석을 확보하지 못했는 데도 다행히 그럴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지난주 중 두 차례에 걸쳐 검찰 고위 관계자는 엄정한 기준 적용을 거론했다고 한다. 총선 사범 처리에서 특정 정파에 유리하도록 하기 위해 검찰권을 행사하지 않을 것이고, 나무를 켤 때 먹줄을 튀겨 선을 긋듯 형평성을 상실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는 것이다.

그의 발언대로 선거 수사가 이 땅에서 혼탁한 선거풍토를 몰아내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그러기 위해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

도성진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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