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CTO, 학생=산업전사 ‘한국형 실리콘밸리’ 영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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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카 캠퍼스의 공대생들이 클러스터에 입주한 한 기업체에서 현장실습을 하고 있다. [한양대 제공]

벤처기업이 기술력만으로 생존할 수는 없다. 자금을 공급하는 벤처캐피털은 물론 어느 정도 규모를 이룰 때까지 보호해주는 인큐베이터가 필요하고, 연구개발(R&D)을 지원하는 대학과 연구기관도 필요하다. 대기업과의 협력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우수한 인력을 공급하는 대학의 존재는 필수적이다. 미국의 실리콘밸리가 성공한 배경이다.

정부가 제2의 벤처기업 육성대책을 발표했다. 벤처기업 육성을 위해서는 실리콘밸리와 같은 산·학·연 클러스터를 이뤄야 한다는 데 이견이 없다. ‘한국형 실리콘밸리’로 영글고 있는 경기도 안산의 한양대 캠퍼스를 심층분석했다.

#1. 올가을 한양대 에리카(옛 안산) 캠퍼스의 심종인(전자통신공학) 교수는 출근과 함께 강의 준비에 분주했다. 오전 강의를 마친 뒤에는 지난해 7월 연구실에서 창업한 ‘에타맥스’에서 들어온 e-메일을 확인했다. 에타맥스는 발광다이오드(LED) 평가장비를 생산하는 기업. 연구원들과 짧은 점심을 먹은 후 곧장 LED 산학협의회 회의실로 향했다. 300여 명의 기업인이 참여하는 협의회다. LED 기술 개발에 애로를 겪는 중소기업인들에게 해결책을 제시하며 오후 시간을 보냈다.

#2. 대덕전자에서 회로기판 개발을 담당하고 있는 배진호씨는 2006년 2월 한양대 에리카캠퍼스 재료공학과를 졸업했다. 학교에서 도입한 특성화 전공 프로그램 덕으로 취업이 수월했다. 회사가 지정한 6개 교과목을 빠짐없이 이수한 것이다. 여기에 회사 내에서 필수적으로 거치는 6시그마 교육도 학교에서 이미 이수한 터라 그다지 어렵지 않게 통과했다. 학창 시절 한 달간 회사에서 현장실습을 거친 것도 업무 과정을 먼저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이처럼 한양대 에리카 캠퍼스는 단순한 대학의 모습이 아니다. 교수가 때로는 중소기업의 최고기술책임자(CTO) 역할을 하기도 하고, 학생은 직장에 들어서자마자 산업전사로 탈바꿈한다. 2003년부터 추진해온 학·연·산 클러스터 구축작업이 마무리되면서 이제 이 캠퍼스는 지역 클러스터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올해 안산 캠퍼스 개교 30주년을 맞아 교명을 에리카 캠퍼스로 변경한 것도 클러스터 마무리를 자축하는 의미였다. 에리카는 교육(Education)·연구(Research)·기업(Industry)·클러스터(Cluster)·안산(Ansan)의 앞글자를 따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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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정부 연구소 유치 성공=에리카 캠퍼스는 이미 민간 주도형 클러스터의 성공사례로 입지를 굳히고 있다. 캠퍼스 내에 기업연구소와 정부 전문연구기관이 속속 입주하면서 다른 지역 클러스터와는 차별화된 시너지가 나오고 있다. 이미 2004년부터 5년간 진행된 한국산업기술진흥원의 산학협력중심대학육성사업 수행평가에서 매년 최우수대학으로 인정받은 게 이를 입증한다.

산업기술진흥원의 김동균 산학연협력팀장은 “대부분 대학의 산학협력이 창업보육센터 운영 수준에 머물렀다”면서 “그러나 에리카캠퍼스는 한 울타리에 대기업과 벤처기업·정부 연구소를 적극 유치했고 이들과 화학적 결합을 이뤘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고 말했다.

에리카 캠퍼스가 기업과 정부 연구소 유치에 발벗고 나선 것은 20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외환위기 이후 김종량 한양대 총장이 낸 아이디어였다. 대학의 장벽을 허물고 33만(약 10만 평)에 달하는 부지를 기업과 정부 연구소에 무상으로 제공한다는 내용이었다. 결국 2003년 캠퍼스 내 벤처기업을 수용하고 지원하는 조직을 갖춘 경기테크노파크가 들어섰다. 2004년 제품·부품을 시험하고 인증하는 한국산업기술시험원이 입주했고, 2006년부터는 LG이노텍과 LG소재부품연구소가 차례로 들어섰다. 2007년부터는 한국전기연구원과 한국생산기술연구원 등 정부연구소도 캠퍼스 내에 분원을 차렸다. 현재 경기테크노파크에 입주한 88개의 벤처기업을 비롯해 150여 개의 기업이 캠퍼스에 입주해 사람과 기술 교류를 활발히 펼치고 있다. 인근 중소기업과 함께 공동으로 연구개발하는 풍토도 뿌리를 내렸다.

김우승 산학기획처장은 “학·연·산 클러스터가 형성되면서 안산 인구가 늘고 있다”며 “기술(Technology)과 관용(Tolerance), 인재(Talent)의 3T가 융합하면서 클러스터는 이제야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차별화된 전략들=에리카 캠퍼스가 자랑하는 ‘학·연·산 용광로’가 바로 공용장비센터다. 2005년 중소기업의 열악한 연구개발 환경을 장비와 기술 지원을 통해 개선하고자 만들었다. 다른 대학과 차별화된 점은 기기별로 운영업체가 지정돼 있다는 것이다. 장비운영자의 잦은 교체로 발생하는 공백기간을 줄였다. 장비를 도입하기 전부터 기업의 수요를 파악한다. 기업체 임직원을 장비도입 심사위원으로 위촉했다. 2006년 87개 기업이 사용한 것을 시작으로 2007년 137개, 지난해 186개 기업이 이 센터를 이용했다.

자동차 피스톤 생산업체인 D사는 제품개발에 성공했지만 우수한 성능을 평가할 방법이 없어 애를 먹었다. 결국 공용장비센터가 보유한 엔진동력계를 이용한 시험을 통해 품질을 인정받아 연 10억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학생들의 교육도 기업이 원하는 수준으로 개선됐다. 창의성과 협동력을 키워주는 종합설계(캡스톤) 디자인 프로그램이 차별화 전략이다. 공대 3, 4학년생 전원이 팀을 만들어 스스로 졸업작품을 기획하고 설계해 교내 경진대회에 참가하는 프로그램이다. 다른 대학에서는 한정된 인원이 참여하는 데 반해 에리카 캠퍼스에서는 모든 공대생이 대상이다. 학생들이 출품한 전시물 중 44건의 특허가 출원됐다.

안산=심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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