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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빈칼럼] 왜 남북기본합의서인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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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남북문제에 관한 한 남북기본합의서는 어느 정권이 들어서도 더 이상의 합의원칙을 도출하기 힘든 남과 북의 고뇌와 상호 존중, 그리고 양보의 정신이 깃들여 있는 남북문제의 기본 텍스트다.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유리하거나 지나치게 불리하지도 않다. 남과 북 어느 한쪽의 정통성만 강조한 것이 아니라 '잠정적 특수관계' 로 상호 실체를 인정하면서 내정간섭을 할 수 없는 두개의 국가 실체를 잠정적으로 묵인하고 있다. 남과 북의 고뇌 어린 합의다.

또 남북 정치지도자의 단발성 합의나 즉흥적 결정을 막고 한반도 평화와 민족의 문제를 제도적 틀 속에서 장기적 논의를 거쳐 도출한다는 뜻에서 중요 사안을 분야별 공동위원회에서 논의하기로 결정해 놓았다.

화해.군사.교류협력 등 공동위가 그것이다. 불과 25조항 4쪽에 달하는 합의문이지만 이 합의를 하기까지 정치.군사.경제 분야에 걸친 남북 현안들이 양측 전문가들에 의해 충분히 토의되고 문제점도 부각된 바 있다.

그런데 이 기본합의서 정신이 4.10정상회담 합의문에 빠져 있다.

'남과 북이 역사적인 7.4공동성명에서 천명된 조국통일 3대원칙을 재확인한다' 고만 하고 기본합의서에 대한 언급을 빼놓고 있다.

북측의 계획된 누락인지 또는 시간에 쫓겨 미처 담지 못했는지 확인할 길이 없지만 정상회담 준비과정에서 이 문제만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사안이다.

김대중 대통령도 이 점에 유의하고 국무회의에서 '정상회담은 7.4공동성명의 정신을 받들고 기본합의서의 내용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할 것임' 을 분명히 하고 있다.

왜 기본합의서가 중요한가. 세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시간낭비를 줄이는 일이다.7.4공동성명은 1972년에 나왔다. 자주.평화.민족대단결 원칙에 따라 통일문제를 논의하자는 초보적 남북합의다.

기본합의서는 그후 20년 세월의 우여곡절을 거쳐 합의한 구체적 내용을 담고 있다. 기본합의서를 빼고 7.4정신으로 돌아간다면 30년 세월을 무효로 되돌리는 시간낭비를 뜻한다. 7.4정신에 따른 정상회담이라면 30년 전으로 돌아가는 기본합의 작업의 새로운 시작을 뜻할 뿐이다.

둘째, 기본합의서를 배제하고 7.4공동성명 정신에 따라 정상회담을 할 경우 남북관계가 왜곡될 소지가 있다.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이라는 북의 통일 3원칙은 특히 '자주' 와 '민족단결' 부문에서 많은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북의 자주와 민족대단결은 우리와는 개념설정이 다르다. 북의 자주는 주한미군 철수를 뜻하고 민족대단결은 보안법 철폐.통일운동의 자유보장 등 통일전선에 유리한 각론을 펼치기 위한 총론적 전략 근거다.

이런 문제점을 뛰어넘고 상대방체제 존중과 내정불간섭을 규정한 게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남북기본합의서다. 이 합의서를 빼고 7.4정신만으로 정상회담을 시작한다면 기본합의서를 무효화하려는 북의 또다른 의도로 오해받을 수 있다.

기본합의서가 남과 북 모두에 절실한 세번째 이유가 있다. 지금 북이 절실히 필요한 것은 남쪽의 에너지 지원, 농업구조개선 지원, 사회간접자본(SOC)투자다.

남쪽이 절실히 바라는 바는 긴장완화와 평화정착을 통한 냉전체제 해소다. 어느 것 하나 단발성에 그칠 단기적 사안이 아니다. 상호 신뢰와 장기적 협의, 유장한 세월을 요하는 지원이고 합의다.

그러나 북쪽 정치체제가 장기집권 체제임에 비해 남쪽은 5년 단위 정권이다.현 정권 임기는 3년 남았다. 정치지도자의 개인적 집념이나 선의에 따라 움직일 단발성.단기성.선심성 약속으로 해결될 사안이 아니다.

국민적 합의와 국내외 기업의 지원과 합의 없이는 한치도 움직이기 어려운 민족의 대사다. 제도적 틀에 따라 협의하고 합의해야 할 민족의 대장정이다. 이를 위해 마련한 장치가 기본합의서에 따른 공동위 설치안이다. 정권적 차원을 떠나 제도적 장치에 따라 남북문제를 협의하는 구조적 접근방식이다.

이런 여러 의미를 담고 있는 남북기본합의서를 무시하고 정상회담이 진행될 경우 그 결과는 단발성.단기성.선심성 대북지원으로 끝나고 남북관계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 나쁜 배신감.적대감으로 가득찬 관계로 악화될지도 모른다. 북에는 60만t의 비료가 지원되고 극히 형식적인 이산가족 상봉이 평양에서 한두번 열리고는 주한미군 철수라는 북의 요구가 나오면서 또 한차례 깜짝 쇼로 끝나버리는 최악의 시나리오도 배제할 수 없다.

이런 악몽을 되살리지 않기 위해 북측당국은 남북기본합의서 정신을 준수한다는 원칙을 '상부' 의 명의로 확인하는 절차를 확실히 거쳐야 한다.

권영빈<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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