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기고] 구조조정에 여·야 편가름 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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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어린 시절 듣던 동화는 흔히 "옛날, 옛날, 한 옛날" 로 시작해 "그 후론 잘 먹고 잘 살았데" 로 끝난다.

그 중간에는 평화로운 나라에 악한이 들이닥쳐 사람을 괴롭히다 홀연히 나타난 용사의 단칼에 쓰러지고 다시 평온을 찾는다는 기승전결의 줄거리가 흥미있게 엮어진다.

악한은 흔히 처녀 잡아먹는 괴물, 못된 산적, 탐욕스런 왕족 등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오늘날 경제사회 문제를 동화처럼 단순한 구도로 파악하는 소아병 환자가 득실거린다.

문제는 단 하나의 요인 때문에 벌어지고, 그 요인만 제거하면 다시 만사형통이라는 사고방식이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크게 진전되는 경제주체들의 분업과 시장 발달, 급속한 기술발전과 산업구조 고도화, 긴밀해지는 세계경제 관계는 동화책 대신 전문서적을 읽는 것이 성숙한 시민의 조건임을 말해준다.

현대 경제사회 문제의 원인을 파고들면 다수 요인들이 얽혀 있다는 인식에 이른다.

1997년 환란(換亂)의 진범은 누구인가. 모든 정치.경제 주체들이 각기 한 자리씩 악역을 분담했다. 이는 너그러운 종교적 고해성사가 아니라 냉엄한 현실사회의 책임의식이다.

이번 총선은 여야 공방이 치졸.치열한 혼탁선거였다. 과거와 다른 점은 입후보자들의 전과.납세실적.병역 등이 공개돼 '애국' 을 입버릇처럼 말하는 정치인들의 비애국적 행적이 드러나 유권자의 선택에 유효하게 작용했다는 사실이다.

여야 논쟁 가운데 두가지가 특히 주목됐다.

하나는 국가부채 규모를 야당은 늘려잡고, 여당은 줄여잡는 공방전이었다.

일부 국제기구의 기술적 정의에 따르면 협의 개념이 맞고, 국가의 장기적 잠재 부채까지 산입하면 광의 개념이 된다.

부채규모 그 자체보다 적정규모가 얼마이며, 과다하다면 합리적 축소방안이 무엇인가에 초점이 맞춰져야 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정부가 세계잉여금의 용도를 당초의 비생산적 지출에서 부채상환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는 점이다.

반면 향후 발생할 수 있는 금융 및 기업부문 구조조정 추가비용의 공적부담에 신축성과 기민성 상실이 우려된다.

둘째로 여소야대가 되건, 여대야소가 되건 나라가 망한다는 쌍방의 주장이다. 정치인의 연설은 평소에도 과장과 요란한 수사법으로 점철된다.

선거 때는 특히 이러한 버릇이 도진다는 점을 국민은 알고 접어준다. 지난 정권의 대를 이은 야당은 환란의 큰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당시 정부의 각종 개혁조치가 야당에 발목을 잡혀 못했다거나, 그후 당 수뇌부가 물갈이됐다 해도 그러하다. 따라서 향후 경제의 구조조정에 대승적으로 협조해야 한다.

한편 현재의 여당은 야당 시절 노동법 개정의 역정, 금융개혁 지연 등에 공동책임을 통감해야 한다.

다소 무리가 있어도 국제통화기금(IMF)과 합의한 조건의 큰 틀이 있었기에 지난해 10%이상의 경제성장, 8백억달러 이상의 외환보유, 아직은 잠잠한 물가 오름세 등의 실적을 올렸다.

그러나 정부가 "경제위기 완전 극복" 을 선언해 경제주체들의 결의와 긴장감을 해이하도록 만든 점이 문제다.

서로 상대방에게 악역을 떠맡기려는 여야를 바라보는 유권자의 눈에는 여대야소든 여소야대든 국민경제문제 해결에는 별 차이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환란 이후 크게 바뀌었다는 금융부문도 은행은 대부분 공기업처럼 운영되고, 비은행권의 문제들도 거미줄처럼 얽힌 대목들이 많다.

조폐공 사건을 강성노조 시각에서 다뤄 공기업 개편이 물건너 가고, 5대원칙 등 정부의 원격조정아래 진행된 민간기업 구조조정은 부채비율 2백%이내 축소 등 외형상 실적은 있으나 내실화는 요원하다.

가장 우려되는 부문은 노동시장이다. 총선 직전 노조들의 봄 투쟁은 환란 이전을 방불케 해 경제의 앞날을 암울하게 만든다. 일부 정부관료들은 다시 규제완화와 투명화에서 물러설 채비를 하고 있다.

경제위기의 진범은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동화속의 요술거울에 물어보라. 영험한 거울이라면 질문자의 얼굴을 비춰 보일 것이다. 위기는 다시 오는가. 총선 세태를 보면 다음 위기가 보인다.

김병주 <서강대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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