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 찍는 자가 말할 수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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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오늘 아침엔 투표를 하러 가자. 앞으로 4년간 정치에 대해 할 말을 하려거든 오늘 투표를 하자. 한 나라의 정치는 그 나라 국민의 수준이라고 한다.

우리 정치수준이 조금이라도 나아져야겠다고 생각한다면 투표를 해야 한다. 선거유세장에 나온 유권자들은 이렇게 얘기한다.

"다 그 소리가 그 소리네요. 서로 욕설이나 해쌓고, 지키지도 못할 공약이나 해대고…" "그 밥에 그 나물이지. 모두 썩어빠졌어" . 그럼 정치인만 썩은 것인가. 그렇게 말하는 우리는 전혀 다른가.

정치는 우리의 거울이고 우리의 정직한 자화상일 따름이다. 이 정치인들이 외계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들의 지지를 얻어, 우리들의 표로 국회의원이 될 사람들이다. 나는 표를 찍지 않았다고? 젊은 사람이 당당하게 자기 의사를 표명한다.

"이런 더러운 선거판에 누굴 찍겠어요. " 그러나 기권은 현상의 묵인이며 그가 비난하는 부패한 정치의 방조에 불과하다.

오늘 아침에는 투표를 하자.

투표소에 가기 전에 마루에 선관위가 보낸 선거공보, 후보자들의 팸플릿들을 죽 펴보자. 그리고 큰 제목이라도 하나씩 살펴보자. 젊은 사람들은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으로 들어가 후보들의 신상을 한번 살펴보는 것도 좋겠다.

은 선관위의 도메인이다. 거기에 들어가 '후보자' 란을 클릭하면 우리 지역구에 나온 후보들이 군대는 갖다왔는지, 세금은 제대로 냈는지 알 수 있다.

전과기록도 볼 수 있다. 또 총선연대의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우리 지역 후보가 낙선대상자에 포함돼 있는지, 왜 낙선대상자가 됐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곤 이 국회의 지난 4년을 생각해보자. 국회는 제 할 일을 했는지, 총풍.세풍 바람 속에 방탄국회 노릇이나 하면서 개혁의 발목잡는 노릇이나 하지 않았는지, 안정의석을 요구하는 정당은 무엇을 했는지, 야당은 정말 제대로 견제역할을 했는지 되짚어봐야 한다.

김대중(金大中)정부의 2년도 생각해봐야 한다. 국제통화기금(IMF)위기는 과연 극복된 것이며, 금융과 재벌의 구조조정은 제대로 됐는지, 옷 로비는 권력층과 가진 자들의 부패커넥션을 드러낸 것이 아니었는지, IMF 위기를 구하기 위해 장롱 속의 금을 내놓았던 우리 서민대중에게 돌아온 보상은 무엇이었는지도 따져봐야 한다.

선거 후에는 어떻게 될지도 잠깐 생각해보자. 무엇이 우리에게 안정인지, 주가가 폭락할는지, 남북정상회담은 잘 돼갈 것인지, 아니면 또 한차례 사정(司正)바람, 정계개편 바람이 불어닥칠 것인지도 한번쯤 생각해봐야 할 대목들이다.

이번 선거는 우리의 정치가 증오(憎惡)의 정치임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상대후보나 상대당은 다른 의견이나 다른 시각을 가진 정당.정치인이 아니라 그들이 정권을 잡으면 마치 나라가 뒤집힐듯, 다른 사람이 국회의원이 되면 마치 나라경제가 몽땅 파산날듯 나쁜 사람.나쁜 패거리로 몰고간다. 마치 상대가 되면 모든 것을 잃는, 따라서 죽기살기식으로 이기지 않으면 안되는 선거운동을 해대니 선거 뒤끝의 후유증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때문에 다시 한번 아침 찬 공기에 머리를 식히고 후보들을 찬찬히 들여다봐야 하는 것이다. 모두들 정치를 비하(卑下)하고 정치인을 욕한다. 그러면서 그들이 벌이는 한판승부에 온 사회가 이렇게 들떠야 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점에서 통념적인 보도로 정치적 혼란과 저질성을 지나치게 일반화하고 때로는 당파성(黨派性)을 드러내는 언론보도의 배경을 잘 살피는 일도 중요하다.

고트프리트 벤은 제2차 세계대전 직전 독일의 정신적 공황기에 독일 청년들의 우상이었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고 많은 지식인들이 망명했을 때 그는 독일에 잔류했다. 망명지식인들은 그를 배신자라고 비난했고 히틀러 정권은 그를 정신병자취급하며 탄압했다.

그는 망명지식인들에게 이렇게 답변했다. "나라를 떠나 남(南)프랑스의 밝은 햇빛이 내리쬐는 백사장에 누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정권을 지지하든 반대하든 여기서 시시각각 이 긴장된 삶을 함께 산 사람들만이 독일의 상황을 말할 수 있다. "

참여한 자만이 현실에 대해 발언할 수 있다. 적어도 우리의 잘못된 정치를 조금이라도 바꾸고 싶다면 한번쯤 총선연대의 구호를 되새겨보자.

"I vote."

김영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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