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대기자의 투데이] 한반도 봄이 오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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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정부의 어떤 설명도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 합의가 투표 사흘 전에, 총선전략 '겸해서' 발표됐다는 의혹을 잠재우지는 못할 것이다.

우연치고는 너무 절묘하다. 만약에 정상회담 발표시기가 정부의 숨은 의도에 따른 것이 아니라면 평양쪽이 '선의의 혐의' 를 받을 만하다.

이런 추리가 가능하다.

김정일(金正日)이 처음에는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햇볕정책을 평화적인 수단으로 북한을 붕괴시키려는 전략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남한이 북한의 냉담한 반응과 거듭된 도발, 남한내 보수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흔들림없이 햇볕정책을 추진하고, 金대통령 스스로 김정일에 대한 덕담을 자주 하는 것을 보고 햇볕정책을 신뢰하게 됐다.

거기에다 북한이 유럽공동체(EU)회원국들과 호주.필리핀.캐나다를 상대로 관계개선을 위한 적극외교를 펴는 과정에서 한결같이 듣는 충고가 남북관계부터 먼저 개선하라는 것이었다.

특히 미국.일본.중국의 그런 권유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햇볕정책에 대한 북한의 인식변화와 다른 나라들의 충고가 김정일 체제의 안정으로 북한 지도부가 자신감을 되찾고 흡수통일의 피해망상을 극복한 것과 시기적으로 일치했다는 사실이다.

북한은 햇볕정책을 신뢰하는 이상 총선에서 김대중 정부의 안정 의석 확보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북한을 지원하는 데 남한 이상의 조건을 갖춘 나라가 없고, 고도의 경영 노하우와 자본을 가진 남한과 임금은 싸지만 양질의 노동력을 가진 북한은 최상의 파트너라고 판단하지 않았을까. 이렇게 해서 한반도에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정상회담의 발표시기와 관련된 시비는 문제가 되지않는다.

국내정치를 시야에 두고 있었다고 해도 앞으로 정상회담 자체와 후속 접촉들을 정략적으로 이용하지 않는다면 남한 지도자가 처음으로 평양에 간다는 사실의 역사적 중요성은 전혀 손상되지 않는다.

삼국이 정립(鼎立)하고 있던 642년 신라의 김춘추(金春秋)가 백제에 대항하는 군사동맹을 교섭하러 고구려에 간 적이 있지만 그건 그가 태종무열왕이 되기 전의 일이다. 대립항쟁하는 두 나라 또는 세 나라의 한쪽 수뇌가 '적진(敵陣)' 을 방문하는 민족사적인 사건은 이번이 처음이다.

현대사에서 金대통령의 평양방문에 비견될 사건은 1970년 서독총리 빌리 브란트가 동독 에어푸르트에서 빌리 슈토프 총리를 만나 동.서독 기본조약(72년)의 기본틀을 논의한 것과 1977년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이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으로 달려가 메나헴 베긴 총리와 평화협정(79년)의 기초를 만든 것이다.

당시로서는 상상을 초월한 브란트와 사다트의 결단은 각각 독일통일과 중동평화로 가는 장정(長征)의 첫걸음이 됐다. 특히 아랍인들의 반대속에 예루살렘 방문을 결행한 사다트는 그뒤 아랍인의 손에 암살되는 운명을 맞았다.

남북정상회담에 거는 기대도 수없이 많은 현안의 일괄타결이 아니라 평화공존으로 가는 장정의 첫걸음이 되라는 것이다. 6월 정상회담은 이산가족.보안법.평화협정.주한(駐韓)미군 같은 구체적인 현안을 해결하기보다 반세기에 걸친 적대와 상호불신으로 막힐 대로 막혀버린 남북관계에 '개념적인 돌파구' 를 찾는 자리가 돼야 한다.

남북의 수뇌들이 화해와 신뢰의 초석을 놓으면 구체적인 현안은 후속 정상회담과 실무접촉에서 해결할 수 있다.

이스라엘이 아랍인들에게 땅을 주고 아랍이 평화를 보장하는 것이 중동평화의 공식이라면 남북한은 북한이 평화에 동의하고 남한이 경제협력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화해와 공존을 실현할수 있다. 평양회담에서 북한이 대결구도와 냉전체제를 풀고 평화공존할 의지가 있음을 확인한다면 그것으로도 역사적인 성과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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