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노패스트15 [13] 케이비테크놀러지, 국제인증 70여 개 받은 스마트카드 OS기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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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여의도 케이비테크놀러지 본사에서 조정일 사장이 자사가 개발한 운영체제가 적용된 집적회로(IC) 칩들을 들어 보이고 있다. [오종택 기자]

‘이노패스트 15’는 혁신(Innovative)을 통해 고성장(Fast-Growing)을 일궈내는 우량기업을 가리킵니다. ‘한국 대표기업’이라고 하기엔 아직 부족하지만 미래의 성장동력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는 중견·중소 기업들입니다. 중앙일보는 작지만 강한 15개 이노패스트 기업의 창업·성장 스토리를 통해 기업가 정신이 기업의 성장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조명할 예정입니다. 세계적 컨설팅 업체인 딜로이트의 컨설팅도 함께 소개합니다. 또 매년 이들 기업의 성과를 다시 취재해 성공과 실패의 원인도 분석해 나가겠습니다.

서울 여의도의 케이비테크놀러지(KEBT) 본사.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절차가 공항 검색대 통과보다 더 까다롭다. 먼저 신분증을 제출하고 지문인식기에 지문을 등록한다. 바깥 문과 안쪽 문 사이 밀폐된 공간을 지날 때는 미리 적어 낸 몸무게와 일치하는지 검사를 받는다. 신분 확인 없이 묻어가는 사람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안쪽 문에선 또 지문 체크. 바깥 출입구에서 등록한 지문과 일치하는지 확인돼야 열린다. 한 명이 들고 나는 데 1분씩 걸린다. 70여 명 직원의 출퇴근 시간에는 줄이 길어진다.

엄격한 출입 통제 시스템은 이 회사가 스마트카드 칩 운영체제(OS)를 개발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조정일(47) 사장은 “OS 개발 과정이나 설계가 외부로 새나가면 해킹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조폐공사 못지않은 보안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이 분야의 국제 인증기관들은 사무실 출입 관리부터 제품 성능까지 세밀한 기준을 세워 놓고 있다.

스마트카드는 집적회로(IC) 칩을 부착해 대용량 정보를 담을 수 있는 전자식 카드. 신용카드나 교통카드에 박혀 있는 손톱만 한 크기의 금색 칩이 그것이다. IC칩은 정보 저장용량이 크고 보안성이 높아 마그네틱 선을 대체하고 있다. 최근에는 휴대전화의 범용가입자 인증모듈(USIM)로 영역을 넓혔다. 전자여권·전자주민증·의료보험증에도 들어간다.

스마트카드 칩 OS의 핵심 기술은 보안성이다. 금융거래에 쓰이고 개인 정보를 담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 개발한 프로그램이 국제 인증을 받기 위해선 꼭 해킹을 견뎌내는지 보안 테스트를 거친다. 해커들이 공격을 시도해 방어망이 뚫리면 퇴짜다.

KEBT는 직접 개발한 스마트카드OS 70여 개에 대해 국제 인증을 받았다. 국내 기업 중 국제인증을 가장 많이 갖고 있다. 국내 시장 점유율도 1위. IC칩이 들어간 신용카드 10장 중 7장에 이 회사의 기술이 녹아 있다. 스마트카드 사업 시작 후 3년 만이다.

성공은 아픔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성균관대 물리학과 80학번인 조 사장은 대학 때부터 컴퓨터를 접한 정보기술(IT) 1.5세대. 대우통신·한국정보통신 등에서 경력을 쌓은 뒤 1998년 창업했다.

처음엔 부산에서 교통카드 사업을 시작해 전국으로 넓혀 갔다. 시내 버스에 카드 단말기를 달고, 선불 교통카드로 요금을 결제하는 시스템이었다. 소액을 결제할 수 있는 전자화폐 사업도 곁들였다. 사업 초기에는 교통카드 시스템을 설치하는 대로 돈을 끌어 모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유지보수 비용은 눈덩이처럼 불고, 수익은 한계에 봉착했다. 해외 진출도 시도해 봤으나 재미를 보지 못했다. 그러다 서울시가 교통카드 시스템을 도입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기회다 싶어 대기업과 컨소시엄을 결성해 입찰에 들어갔다. 하지만 결과는 탈락.

그 뒤로 경영 상황은 점점 나빠졌다. 영업이익이 2002년 79억원에서 다음 해 7억8000만원으로 10분의 1로 줄었다. 조 사장은 기존 사업을 살리는 대신 접는 길을 택했다. 교통카드 사업을 매각했다. 내다 팔 수 있는 건 모두 내다 팔면서 과감히 정리했다.

“붙잡고 있어 봤자 생명을 연장할 뿐이지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은 이미 없었지요.”

당장 먹고살 거리도 없는 상황이 됐다. 그래도 다시 성장동력을 찾기 시작했다. 버는 건 없이 돈을 쓰기만 하니 2005년엔 185억원의 적자가 났다. 컨설팅 회사의 도움을 받아 회사의 역량을 냉정하게 분석했다. 신사업 선정 기준은 글로벌화에 적합하고, 기업이 10~20년 영속 가능하며, 진입 장벽이 있는 분야로 좁혔다. 여기에 딱 맞는 게 스마트카드 OS였다.

국제 규격에 맞춘 국제 인증을 통해 사업이 진행되기 때문에 초기 진입장벽은 높지만, 그 이후엔 안정적인 성장이 가능했다고 본 것이다.

“교통카드 사업으로 쓴맛을 안 봤다면 새로운 도전 기회를 찾지 못했을 거예요. 미련을 갖고 머무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 게 행운이 됐죠.” KEBT는 국내 스마트카드 시장을 평정한 뒤 해외로 눈을 돌렸다. 해외에 60여 개 영업 채널을 구축해 해외 마케팅을 강화했다. 지금은 해외 매출이 절반(45%)에 이를 만큼 기반을 닦았지만 처음엔 낮은 브랜드 인지도가 걸림돌이었다.

“글로벌 기업들에 비해 브랜드 인지도가 없었기 때문에 제품의 안정성이나 성능을 알리는 게 어려웠어요. 부족한 부분은 기술력과 순발력, 가격 경쟁력으로 채웠죠.”

기술자 출신인 조 사장이 직접 해외에서 뛴 게 먹혀 들었다.

“상담 중에 고객이 ‘이런 것도 가능하냐’고 물어오면 바로 서울에 개발을 지시했어요. 며칠 뒤 샘플을 가져가면 고객이 깜짝 놀라죠. 몸집이 큰 대기업들은 이렇게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하거든요.”

그렇게 하나 둘씩 고객이 생겨났다. 기술도 알고, 딜도 할 줄 아는 조 사장을 찾는 이가 많아졌다. 2007년 17억원에 불과했던 금융 부문 해외 매출은 1년 만에 89억원으로 4배 늘었다. 올해는 지난해보다 세 배 가까이로(248억원) 늘었다. 일년의 3분의 2를 해외에 머물며 뛴 결과다. 지난해엔 200억원 규모의 태국 전자주민증 사업을 따냈다. 내년에는 인도·아프리카·중동 등을 공략할 계획이다.

조 사장에게 남은 도전은 글로벌 플레이어로 도약하는 것. 현재 스마트카드의 종주국인 프랑스를 비롯해 유럽과 미국 회사 4곳이 세계 시장의 70~80%를 장악하고 있다. 이런 과점구조를 뚫고 2013년 글로벌 빅5로 올라서는 게 목표다. 4년 뒤 매출액 5000억원이 되면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해외에서 쌓은 인맥을 활용해 사업을 확대하고, 해외 기업의 인수합병(M&A)을 통해 목표를 이룰 계획이다.

특별취재팀=금융증권팀 김준현 차장, 김원배·김영훈·조민근·박현영·한애란 기자, 사진=오종택 기자

이런 점은 보완하세요
CEO 1인 플레이로는 한계 … 글로벌 마케팅 역량 갖춘 해외 인재 확보를

“우리 회사의 사원급은 대기업 과장급 이상의 역할을 해낸다”는 최고경영자(CEO)의 말처럼 이 회사는 자체 인력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국내 유일의 국제인증을 받은 스마트카드 OS 플랫폼을 개발할 수 있었던 것도 우수한 인력풀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부터다. 글로벌 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입한 것은 사실이지만 시장 선도기업들과의 본격적인 경쟁에 대비해야 한다.

국내 스마트카드 시장의 70% 이상을 점유한 이 회사가 겨냥하는 것은 세계시장이다. 제품의 품질에서 경쟁우위를 갖고 있는 것은 분명하나 이를 세계시장에 알려야 하는 마케팅 이슈가 남아 있다. 이 과제를 풀 수 있는 것은 글로벌 시장에서 통할 수 있는 마케팅 역량을 갖춘 인재군이다.

지금까지 이 회사의 해외 마케팅은 전적으로 CEO에 의존했다. 사장이 직접 발로 뛰면서 세계 시장의 문을 두드렸고 실제로 상당한 효과도 있었다. 그러나 회사의 규모가 커지고 목표시장 역시 확대되면서 1인 플레이는 한계에 부닥친다.

대기업을 제외하고는 정보기술(IT) 업종에서 해외 마케팅 경험이 있는 인력을 찾기 힘들다는 점을 감안할 때 가장 현실적인 대안은 해외인력 고용이다. 역량 있는 해외 인력을 활용하는 것은 성공적인 현지화와 글로벌 경쟁력 강화 측면에서 필수다.

이 회사의 핵심 성장동력은 기술력이다. 높은 수익성에도 불구하고 뛰어들 엄두조차 내기 힘든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할 수 있었던 것도, 글로벌 업체들과의 경쟁 끝에 굵직한 사업을 수주할 수 있었던 것도 뛰어난 기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마트카드와 같이 첨단기술의 경연장을 연상케 하는 시장에서 기술의 종착역은 없다. 소수의 메이저들이 과점 형태로 지배하는 시장에서 살아남을지 여부도 결국 차별화된 기술에 달려 있다.

스마트카드 OS플랫폼은 보안이 생명이다. 단기적으로는 제품수명을 늘리는 방향으로 기술 개발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 OS의 보안경쟁력을 더 높여 지능적인 해킹에 대비해야 한다.

보안의 우수성을 입증하는 방법은 표준에 대한 리더십이다. 궁극적으로는 시장에서 지배적인 표준을 정립하고 유지하는 기업이 살아남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현재 보유하고 있는 자체 표준의 보급을 늘리고 외부와의 제휴를 통해 표준의 사용기반을 넓히는 시도가 활발해져야 할 것이다.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고 특정 시장으로의 진입을 쉽게 하기 위해 연관기업을 인수할 수 있다. 개인화된 서비스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서도 혼자 모든 것을 하겠다는 생각은 금물이다. 목표로 하는 사업에 동반 진출할 수 있는 글로벌 파트너를 물색하고 이들과의 협력을 포함한 장기전략을 차근차근 수립해갈 필요가 있다. 이는 “궁극적으로는 서비스사업을 하고 싶다”는 CEO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현실성 있는 대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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