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총선체험] 3.유세장에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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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나는 그동안 선거에 큰 관심이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그들만의 리그' 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들만의 리그' 란 미국의 여가수 마돈나가 출연했던 여자 프로야구 선수들의 이야기로, 대중의 관심을 끌지 못할 때 야구인들이 흔히 쓰는 말이다.

그러나 이번 총선만은 좀 다를 것으로 기대했다. 총선연대가 눈에 불을 켜고 낙선운동을 벌이고 있고 숨겨진 병역문제, 철면피처럼 땡전 한푼의 세금도 내지 않는 후보들의 실상, 여기에 '화려한' 전과경력까지 낱낱이 공개되고 있으니 자연히 관심이 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난 5일 서울 도심의 한 초등학교 교정에서 있었던 합동유세장 광경을 보면서 기대감은 또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지 후보의 연설이 끝나면 운동원들로 보이는 청중들이 여전히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당당하게 자신의 정책과 정치철학을 피력하기보다는 소속당의 보스를 내세우고 상대당 보스를 무차별로 욕하는 보스 의존 전략도 여전했다. 그것은 마치 야구에서 대타 기용이 너무 많아 누가 주전선수인지 구별할 수 없는 상황과 흡사했다.

추첨에 따라 첫 연설자로 나온 야당 후보'가 처.아들.며느리까지 동원해 유권자들에게 정성스럽게 큰 절을 올렸다. 그리고는 곧바로'는 여당 후보가 군 경력과 학력을 허위로 기재했다며 포문을 열었다.

일격을 당한 여당 후보는 자신은 육군을 만기제대했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이미 연설을 마친 야당 후보 지지자들은 후보만 남겨 놓은 채 자리를 떠났다. 여당 후보 연설까지 끝나자 5, 6천명에 가깝던 청중이 1천여명으로 줄어들었다. 나머지 4명의 후보들은 썰렁한 분위기 속에서 연설을 계속했다.

합동유세도 초.중학교 배정처럼 추첨이 중요하다는 걸 느꼈다. 6명의 후보 중 당선 가능성이 큰 '빅3' 의 메이저 리거들을 제외한 나머지 마이너 리거들은 보스정치와는 무관한 사람들이어서 기존 정치인과 정당들을 싸잡아 공격하는 것이 이채로웠다.

그래도 눈에 띄게 달라진 것이 있다면 갖가지 다채로운 복장과 제스처 등으로 유권자들의 눈길을 끌려는 운동원들이다. 그들은 지친 속에서도 리더가 "하나, 둘, 셋" 하면 미소로 "안녕하십니까. ○○당 후보 ○○○입니다" 라며 연신 허리를 굽혔다.

우리의 선거풍토는 정작 주전선수격인 후보자들은 예전 그대로이고 프런트(구단 직원)격인 운동원만 세련되고 있으니 '그들만의 리그' 로 남는 것은 아닐까. 유세장을 떠나면서 혼자 뇌까려 보았다.

후보자와 정치인들을 1, 2년만이라도 야구선수로 등록케 해 규칙과 페어플레이 정신.팀워크.희생정신.깨끗한 승복을 몸에 배게 하는 '국회의원 리그' 를 하나 만들면 어떨까 하고.

허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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