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노총 “복수노조 땐 더 투쟁적인 노조가 지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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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문제 등 노동 현안을 논의하기 위한 4자회담이 30일 오후 국회에서 열렸다. 임태희 노동부 장관, 김영배 한국경영자총협회 부회장, 장석춘 한국노총 위원장,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왼쪽부터)가 회담을 하기 위해 자리로 이동하고 있다. [안성식 기자]

내년에 시행되는 복수노조 허용과 노조 전임자에 대한 임금 지급 금지를 두고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던 한국노총이 기존 입장을 완전히 뒤집었다. 복수노조를 금지하고, 전임자 무임금 제도는 시행하더라도 일정 기간 유예하자는 것이다. 두 제도가 담긴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은 1997년 3월 제정됐으나 세 차례 시행이 미뤄졌다. 2002년 노사정 합의에 따라 내년 1월 1일에는 자동적으로 시행된다.

한국노총은 그동안 “복수노조는 전면 허용하고 모든 노조가 사용자와 따로 교섭해서 노조별로 임금과 단체협약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노조 전임자 임금은 “각 기업의 노사가 협의해 자율적으로 결정할 사안”이라며 법으로 금지하는 것에 반대했다. 노사정 6자 대표자회의를 한 달여 동안 진행하는 동안에도 이런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한국노총 장석춘 위원장은 “(요구 관철을 위해) 감옥 갈 각오가 돼 있다”고 했다. 한국노총 안에 삼성·포스코를 겨냥한 ‘비노조기업 노조 설립 태스크포스팀’을 꾸리기도 했다. 이는 민주노총과 의견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두 노총의 연대 총파업이 가시화되는 듯했다.

그러나 30일 장 위원장이 이런 기조를 바꾸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그는 “복수노조가 허용되면 조합원의 인기를 얻기 위해 (각 노조가) 다투어 목소리를 높이고, 무리한 요구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더 투쟁적인 노조가 지배하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했다. 기자들과의 일문일답에서는 “노동운동 차원에서는 (단결권을 보장하기 위한)복수노조 허용에 이의가 없지만 조직 내에서 복수노조를 반대한다”고 털어놨다. 그동안 명분 때문에 ‘복수노조 허용, 자율교섭’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또 그 주장을 그대로 시행하면 사업장이 큰 혼란을 겪는다는 점을 자인한 셈이다.

장 위원장은 “노조 스스로 전임자 임금을 부담하도록 재정을 확충하는 노력을 하겠다”고 말했다. 대신 관련 법을 폐기하거나 시행하더라도 준비기간을 달라고 정부에 제안했다. 법 폐기만을 요구하던 기존 입장에서 물러나 한 번 더 유예하자는 것이다.

이런 한국노총의 입장 선회는 기존 노조의 기득권을 보호하면서 조직을 보듬기 위한 고육책으로 풀이된다. 익명을 요구한 한국노총 관계자는 “복수노조가 허용되면 기존 노조가 다른 노조에 위협받을 것이라는 불안감이 팽배했다”고 말했다.

총파업을 공언했지만 호응은 기대에 못 미친다. 지난달 27일 실시된 SK에너지 노조원의 총파업 투표 참여율은 19%에 그쳐 부결됐다. 정부는 예전과 달리 한국노총의 총파업 압박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한국노총이 정부·경영계와 3년 전 두 제도의 시행에 합의했다는 점도 발목을 잡았다.


◆정부·경영계·민주노총은 부정적=정부는 내년 시행 방침을 거듭 확인했다. 노동부 전운배 노사협력정책국장은 “한국노총의 제안은 하지 말자는 것과 같다”며 일축했다.

경영계도 난색을 표하기는 마찬가지다. 한국경영자총협회 관계자는 “노조 전임자에게 계속 임금을 주자는 것은 현재의 불합리한 노사관행을 그대로 이어가자는 얘기”라고 말했다.

다만 삼성·포스코·LG전자는 환영하는 눈치다. 비노조기업이거나 협력적 노사관계가 정착된 기업이다. 반면 현대·기아자동차, 두산그룹 등은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한국노총의 제안을 두고 경영계 내부의 의견 대립이 더 첨예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래서 경총 이동응 전무는 “노사정 간 접점 찾기가 더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한국노총의 파트너였던 민주노총은 기자회견을 열어 “복수노조는 유불리를 따지는 이해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인권·평등·자유 등과 같은 기본적 노동자의 권리에 관한 문제”라며 “양 노총의 공조를 불가능하게 하는 행위”라고 비난했다.

김기찬 기자, 사진=안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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