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보자에 띄운다] 이런 국회의원 보고 싶습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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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28, 29일 양일간 등록을 마친 후보들은 일제히 16일간의 법정 선거운동에 돌입한다. 이를 계기로 박원순 변호사가 후보에게 보내는 간곡한 부탁의 글을 썼다.

출발의 신호탄이 울렸습니다. 전국 2백27개 선거구에서 일제히 선거운동의 막이 올랐습니다. 1천명이 넘는 국회의원 후보들이 표밭을 향해 누비기 시작했습니다.

후보께선 지금 어디에서 뛰고 있습니까. 새 세기의 문턱에서 거대한 정치실험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2000년 총선은 단지 16대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에 그치지 않고 향후 대통령선거, 나아가 21세기 전반의 한국 사회 진운과 향방을 결정짓는 분수령입니다.

되돌아보면 신물이 납니다. 썩고 병든 정치, 무능 저질의 정치, 분열과 갈등의 정치…. 그 모든 정치의 모습이 우리를 슬프게 만들었습니다. 광복 50년, 정치는 언제나 사회적 질병의 원천이었고 개혁의 병목이었습니다.

언젠가부터 이런 농담이 있었지요.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지면 그대로 원숭이지만 국회의원이 선거에서 떨어지면 사람도 아니다."

국회의원이 되면 사주팔자와 족보가 바뀌었습니다. 지역구 관리에 엄청난 돈을 쓰면서도 국회의원이 부도났다는 말은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다 삐끗하면 감옥에 가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국회의원은 교도소 이웃사촌" 이라는 말까지 생겼지요. 이 모든 악의 근원은 바로 선거에서부터 출발했습니다.

'30당20락' 이라는 말을 들어보셨겠지요. 30억원을 쓰면 당선되고 20억원을 쓰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돈을 쓰고 나면 임기 중에 그것을 벌충할 수밖에 없는 일 아닙니까.

지역감정 자극도 도를 넘은 지 오래입니다. 특정지역을 토대로 존립하고 있는 정당들의 기본 선거전략 자체가 지역감정을 어떻게든 부추겨 표를 많이 얻는 것입니다.

흑색선전.매터도.상호비방이 유권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듭니다. 이런 행태들이 안그래도 냉소적인 유권자들에게 더욱 정치혐오감을 불러왔습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바뀌고 있습니다. 선거감시기관과 유권자의 눈은 더욱 매서워졌습니다. 병역.전과사실.세금납부실적이 공개되고 언론을 통한 정책토론이 전국적으로 실시되고 있습니다.

시민단체들은 후보들에 대한 정보공개는 물론 심지어 일부 후보들에 대한 낙선운동까지 천명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선거과정뿐만 아니라 선거 후에까지 부정선거에 대한 철저한 추궁을 다짐하고 있습니다. '당선만 되면 그만' 이라는 생각은 이제 바꾸어야 할 때가 됐습니다.

아시겠지만 국회의원을 포함한 그 어떤 공직도 이제 결코 부와 권력의 상징일 수 없습니다. 적당히 돈번 사람이 한번쯤 꿈꾸는 자리가 지금까지의 국회의원이었다면 앞으로는 봉사와 헌신의 자리일 뿐입니다.

국회의원은 더 이상 군림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국회의원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갖고 당선된다면 패가망신하기 꼭 알맞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후보가 있다면 지금이라도 사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정말로 우리는 보고 싶습니다. 가난하지만 꼿꼿하게 자신의 인생을 살아온 사람. 법정선거비용도 너무 많아 그 한도도 미처 쓰지 못하는 사람. 자전거 타고 다니며 직접 선거운동하는 사람. 선거브로커, 돈주는 자원봉사자를 쓰지 않는 사람. 변변한 사무실 하나 두지 못한 사람. 당선되지 못하면 못했지 불법.편법선거운동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실천에 옮기는 사람…. 그렇습니다. 이런 후보들을 깐깐한 우리 유권자들이 모두 당선시켜 국회에 가득한 날을 보고 싶습니다.

박원순<변호사.총선연대 상임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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