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웅의 문단 뒤안길-1970년대 <42>정○용, 김○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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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호 10면

정지용(왼쪽)과 김기림

1970년대 중반까지도 6·25전쟁 중 월북한 문인들의 이름을 거명하거나 그들의 작품을 거론하는 것은 금기였다. 이광수·김동환·김억·김진수 등 북한군에 납치돼 북으로 끌려간 것이 확실한 몇몇 문인들을 제외하고 일단 북으로 간 모든 문인들이 금기의 대상이었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물들어 스스로 북한을 선택한 문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사상성이 불투명하거나 북으로 가게 된 동기가 모호한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 가운데서도 정지용·김기림·이태준·박태원 등은 전쟁 이전의 행적으로 봐서 공산주의자일 수가 없고, 따라서 스스로 월북했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데도 싸잡아 금기의 대상에 포함됐다. 6·25전쟁 이전의 한국문학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불가피하게 그들의 이름을 거명할 때는 이름 가운데 한 자를 ○의 복자(覆字)로 표기해야 했다. 예를 들면 정지용, 김기림을 정○용, 김○림으로 표기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표기했다 해도 그것이 정지용, 김기림인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으니 결국은 ‘눈 가리고 아웅’이었던 셈이다.

비공식적이나마 납·월북 작가의 해금문제를 처음 제기한 사람은 소설가 선우휘였다. 77년 초 선우휘는 한 월간지가 마련한 이용희 통일원 장관과의 대담에서 이 문제를 조심스럽게 거론한 것이다. 그는 한국문학사가 완벽하게 복원되기 위해서는 언젠가는 월북 문인들의 작품조차도 활발하게 연구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전제했다. 다만 당장의 전체적인 해금에는 문제가 있으므로 단계적으로 풀어가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그가 제시한 첫 단계는 ‘우선 납·월북 문인의 1930년대 작품을 선별해서 연구 평가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이용희 장관의 반응은 일단 긍정적이었다. 통일원은 곧바로 이 문제에 대한 본격적인 검토 연구에 들어갔다. 꼭 1년이 지난 78년 초 통일원은 ‘납·월북 문인의 해금’에 관한 자료를 국회에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이 자료는 우선 월북 문인과 그 작품에 대한 거론은 ‘민족사적 정통성의 확립에 기여한다는 견지에서만 무방하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그리고 세부 기준으로는 첫째, 월북 이전의 사상성이 없고 한국 근대문학사에 기여한 바가 현저한 작품이어야 하며 둘째, 문학사 연구의 목적에 국한하되 그 내용이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에 저촉되지 않는 작품이어야 한다는 점이 명시돼 있었다.

그러나 통일원의 이 자료는 ‘계속 규제’와 ‘해금’의 경계선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아 누구의 어떤 작품이 규제로부터 풀리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특히 월북 문인 작품의 출판문제에 대한 출판계의 질의에 문화공보부는 ‘연구가 허용되는 작품은 출판을 할 수 있으되 연구 목적으로만 이용될 수 있고, 일반 시판은 불가하다’는 유권해석을 내려 ‘결국 규제완화는 말뿐이지 않느냐’는 의구심을 자아내게 했다. 다만 납·월북 문인의 이름 가운데서 ○의 표기가 사라지고 정지용의 ‘향수’ 등 귀한 작품들을 마음 놓고 읽을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발전이라면 발전이었다.

문공부의 유권해석이 있었다지만 ‘연구 목적’이라는 명분으로 출판된 ‘문장’ ‘개벽’ 등 30년대 문예지의 영인본은 일반도 원하기만 하면 쉽게 구입할 수 있었고, ‘정지용 시집’ ‘김기림 시집’의 영인본도 시중에 은밀하게 나돌았다. 심지어는 월북 후 북한의 부수상까지 지낸 홍명희의 ‘임꺽정’이 해적판으로 나와 연줄연줄로 날개 돋친 듯 팔리기도 했다.

납·월북 문인들의 사상성 없는 작품들이 대중사회 속에 깊이 스며들면서 문단과 독자들 사이에서는 정지용, 김기림 등 몇몇 문인들은 완전히 해금돼야 하는 게 아니냐는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6·25전쟁 이전에 사사로운 일로 월북했다가 눌러앉은 이태준이나, 좌익단체인 ‘카프’ 시절의 동료 문인들에 휩쓸려 월북했다가 북한을 찬양하는 작품활동을 폈던 박태원은 또 그렇다 치더라도 정지용과 김기림만은 해금하는 데 아무런 문제도 없지 않으냐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두 사람에게 대한 관계당국의 입장은 여전히 ‘자진 월북’ 쪽에 무게가 실리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북행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도 온갖 ‘설’이 난무했다. 정지용의 경우 북으로 가던 중 폭사했다는 설, 인민군으로 참전했다가 포로가 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 중 미군에 의해 처형됐다는 설 따위가 그것이다.(다음 회는 ‘정지용 복권운동’ 이야기입니다.)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문학 평론가로 추리소설도 여럿 냈다. 196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 『글동네에서 생긴 일』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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