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일상의 무고한 죽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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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짧게 살다 간 소녀의 영전에 바치는 글이다. 소녀의 부모되는 분들에게 위로가 될 짧은 글이나마 바치지 않으면 내내 괴로울 것 같은 심정에서 쓴다.

지난 15일 중학생이 엘리베이터 안에서 화풀이로 자기보다 어린 중학생을 죽인 사건이 일어났다. 신문 보도에 따르면 중학교 3학년인 한 소년이 아버지로부터 폭언을 듣고 화가 나서 부엌칼을 들고 거리로 뛰쳐 나갔다고 한다.

거리를 배회하던 중 친구들과 행복하게 웃으면서 귀가하는 작은 여학생을 보고 엄마 생각을 했다 한다.

"우리 어머니는 죽도록 고생하는데 저 아이들은 왜 저렇게 행복할까□" 그는 막 친구와 헤어지는 여자아이를 따라 엘리베이터 속으로 따라 들어갔고 짧은 시간 동안 여러 차례 마음이 바뀌었지만 여학생이 내리려는 순간 범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도저히 합리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사회적 재앙' 이 일어나면서 우리는 합리와 이성에 대한 믿음을 잃어가고 있다. 더이상 인과관계가 성립되지 않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극히 방어적으로 사는 길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한 신문 사설에서는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고 학교 생활이 모범적이었다는 '착한' 소년이 그런 범행을 한 것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기 때문에 정신감정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정신감정 운운하는 논설위원은 이 사건이 '정신병자' 에 의한 것으로 밝혀져서 이 세상은 아직 안전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싶어하고 있겠지만 실은 반대로 이 사건이야말로 후기 근대에서 일어나는 범죄의 전형이다.

근래까지 가정내 폭력의 희생자인 아이는 나중에 자라서 자기가 폭력남편이 되거나 아니면 폭력을 휘두른 아버지에게 폭력행사를 해서 복수를 하곤 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그 패턴이 깨지고 있다.

사건과 관련이 없는 무고한 사람이 희생당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타인에게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는데도 무고하게 죽임을 당하는 일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위험 사회' 속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신문에서는 이 사건을 폭력가정의 문제로 풀면서 청소년의 우발적인 범행을 막기 위해서는 어려서부터 감성교육을 해야 한다거나 극단적인 범행을 생각 없이 저지르게 만드는 폭력문화를 바꿔야 한다는 전문가 의견을 싣고 있다.

가정폭력이 청소년 범죄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를 차단하는 장치가 시급하다는 주장도 한다. 일리가 있는 처방이기도 하다. 그러나 누가 문제해결을 위해 팔을 걷어붙이는가?

지금 상태로 간다면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아이들은 점점 더 많아졌으면 많아졌지 줄어들 가능성은 별로 없으며 '학급붕괴' 현상으로 휘청거리는 학교가 그런 정서교육을 해낼 수 있으리라고 믿기 어렵다.

상업주의가 판을 치는 가운데 유해한 환경에서부터 아이들을 격리시킨다는 것 역시 거의 불가능해지고 있다.

위험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하려고 가두어 두다가는 아이가 세상을 제대로 살아갈 능력을 갖추지 못해 결국 낭패를 보게될 것이고, 내버려두었다가는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 그 외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생명보험에 드는 일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돈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무고한 죽음을 줄이기 위해서는 아주 다른 식의 접근이 필요하다.

가정폭력이 청소년 범죄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를 차단하는 장치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가정폭력을 사회문제로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웃에 매맞으며 살아가는 여성의 아이가 '내' 아이의 친구가 될지 아니면 그 아이를 범할 폭력의 화신이 될지는 결국 부모와 시민들의 노력에 달려있다.

'악한' 을 감시하기 위해 아무리 무수한 장치를 한다 해도 이 거대한 익명의 도시공간에서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안전지대는 없다.

'내 아이' 와 '우리들의 아이' 의 테두리를 넓히며 더불어 사는 터전을 만들어 가는 것 외에 우리가 안전한 삶을 되찾을 방도는 없다.

이 험한 세상에 '겁도 없이' 아이를 태어나게 한 부모들은 이제 '나' 와 '우리' 아이를 위해 지역모임을 만들고 국회의원 후보자 중 폭력남편은 없는지 따져보기 시작하자. 폭력적 정치판을 바꾸고 안전한 지역사회를 만들어 가는 열성적인 시민운동가가 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선택사항이 아니다. 그것은 부모 된 자에게 부과된 의무조항이다.

조한혜정<연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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