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리 주연 '트라이어드'… 퇴폐적인 30년대 상하이 묘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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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8면

1930년대의 상하이(上海)는 역사적으로 특별한 시공간처럼 보인다.

어딘지 이국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이며 욕망의 분출과 퇴폐가 뒤섞인, 묘한 흥청거림과 혼돈의 분위기. 20, 30년대의 베를린처럼 상하이는 약동과 쇠락의 징후를 동시에 보인 '동양의 심장' 이었다. 거기에는 후대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신화적인 마력이 있다.

장이모(張藝謨)감독의 95년작 '트라이어드(원제 : Shanghai Triad)' 는 바로 30년대 상하이를 무대로 활약하던 범죄 조직(삼합회)의 이야기다.

도시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벌이는 조직간의 생사를 건 싸움, 조직 내에서의 암투와 음모.배신. 범죄 영화가 관습적으로 다뤄온 코드들을 그대로 담아 낸다.

그러나 범죄 조직의 이야기라는 단축(單軸)으로만 진행되지 않는다. 보스의 정부(情婦)와 순진한 소년의 눈을 끌어들여 영화을 보다 두텁게 만들어 간다.

아편과 매음굴을 쥐락펴락 하면서 어둠의 왕좌에 군림하는 당 나리. 그에게는 클럽 가수인 보배(궁리)라는 애인이 있다. 어느 날 보배의 몸종으로 시골에서 슈생이라는 소년이 올라온다.

'입에 풀칠이라도 하라' 고 삼촌이 소개한 그 자리가 열네살 먹은 슈생에게는 어색하고 낯설기만 했다. 이를 테면 감독은 때묻지 않은 소년의 눈이야말로 30년대 상하이의 뒷골목이라는 낯선 시공간을 관객에게 친절하게 인도하는 '가장 '적절한 매개라고 생각한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범죄 세계의 생리를 알아가고 인간의 권력욕과 물욕을 응시하게 되는 슈생의 변화는 바로 관객들이 느끼는 감정의 흐름과도 맞아 떨어진다.

'트라이어드' 에서는 스타일리스트로서의 장감독의 면모를 여전히 확인 할 수 있다. 특히 '붉은 수수밭' '홍등' '국두' 등 그의 모든 작품들에서 빨간 색에 대해 집착을 보여온 그는 이번 영화에서도 그 집착을 털어내지 않았다.

요염한 몸짓과 자지러질 듯한 목소리로 궁리가 노래를 부를 때 입은 진홍색 복장, 같은 복장으로 무대에 늘어선 무희들이 추어대는 화려한 춤 동작…. 특히 영화가 진행되면서 무희들의 복장을 하얀 색에서 붉은 색, 검은 색으로 바꿔가는 장치는 영화의 전체적인 톤과 분위기를 지배하면서 범죄 영화의 어두운 색조를 완화하는 역할도 한다.

매몰차고 허영에 찬 여인 역을 한 궁리는 상당히 폭넓은 연기를 보여준다.

당 나리 일당이 라이벌 조직의 보복을 피해 외딴 섬으로 피신했을 때 그 곳에 살던 모녀를 보며 '평범한 여인의 행복' 을 갈망하는, 지친 도시 여인의 표정은 전반부의 자신만만하고 오만한 표정과 대비되면서 영화적 효과를 배가시킨다.

이 영화는 서구에 소개됐을 때 "뮤지컬과 느와르를 어정쩡하게 결합했다" 등 호의적인 평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남성의 후광에 기대사는 여인의 헛된 욕망과 쓸쓸함, 돈과 권력을 잃지 않기위해 충복 관계로 맺어진 남성 세계의 허약함, 무구한 섬 소녀와 사귀어보려는 소박한 소망마저 실패로 돌아가는 소년 슈생의 좌절 등은 장감독의 다른 작품들보다 높게 살 줄만한 요소들을 훨씬 많이 내장하고 있다. 25일 개봉.

이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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