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단 중진들, '한국문학' 진지한 문예지 선언 맞춰 분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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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젊은 여성작가들이 풍미해온 문단 현실을 비판하며 중진작가들이 분발하고 나섰다.

중진 소설가 홍상화(60)씨가 계간 '한국문학' 의 주간을 맡아 처음으로 내놓은 봄호에서 "50대 이상 중진작가들의 창작의욕을 불러일으키는 문예지가 되겠다" 고 선언했다.

홍씨는 "1990년대 들어 문학이 진지한 고민 없이 얄팍한 감성만으로 호소하는 경향을 보이다보니 진지한 독자들을 잃었다. 젊은 여성작가들이 각광을 받는 동안 중진 작가들은 발표지면을 잃은 채 구석에서 원고지만 구기고 있는 현실이 됐다" 고 주장했다. 홍씨는 비슷한 연배의 중진작가들과 이런 현실을 개탄하다가 "상황을 바꿔보자" 며 '한국문학' 주간을 맡았다고 한다.

홍씨는 89년 월간 '한국문학' 을 인수했으나 지금까지 소유만 했지 편집이나 제작에는 전혀 간여해오지 않았다. 한국문학은 73년 고 김동리씨가 창간, 80년대까지만 해도 '현대문학' . '문학사상' 과 함께 3대 월간 문예지로 명성을 날렸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독자가 줄면서 계간지로 바뀌고 IMF직후에는 1년간 휴간하기도 했다.

그러다 새로운 세기를 맞아 소유주인 홍씨가 직접 주간으로 편집을 맡으면서 '중진작가와 진지한 독자들을 위한 문예지' 를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

홍씨의 주장에 호응, 이번 봄호에 6명의 유명 중진작가들이 신작을 발표했다. 최일남(68).정을병(66).서정인(64).이문구(59).한승원(61).현길언(60)씨 등이다. 이들중 정을병.이문구.현길언씨 등은 과작이기도 하지만 최근 문예지에서 보기 힘들던 작가들이다.

이문구씨는 "중진작가들의 경우 그동안 젊은 세대에만 시선이 집중되는 현실을 비판하면서도 마땅히 대안이 없어 답답해온 게 사실이다. 사업을 하던 홍씨가 문학에 전념하겠다고 나섰고 그 취지에 공감하는 만큼 좋은 글을 만들어 내려고 노력했다" 고 말했다. 이씨는 "근래에는 바쁘기도 하고 힘들기도 해 글을 많이 못쓰는데, 지난 겨울에는 독감을 앓으면서도 한국문학에 신작을 써내느라 힘들었다" 고 밝혔다.

한국문학의 청탁을 받아 여름호에 실을 단편을 쓰고 있는 김문수(61)씨는 "우리끼리는 '한 물 갔다' 며 자탄하기도 했다. 문예지들이 젊은 여성작가들을 선호하다보니 우리에겐 별 청탁도 없었고, 그렇다고 신작을 써 실어달라고 부탁하기도 쑥스럽고…, 그런 마당에 한국문학이 청탁해오니 반가워 열심히 쓰고 있다" 고 말한다.

환갑을 전후한 작가들의 이번 신작들에는 연배에 어울리게 인생을 관조하는 여유와 전통적이고 구수한 문체가 담겨있다. 최일남씨의 '힘' 은 턱걸이대회에 나가는 노인을, 이문구씨의 '장평리 찔레나무' 는 시골마을의 풍경을 소재로 삼아 중진들이 보는 세상풍경을 그렸다. 읽어보면 입안에 감기는 생생하고 감칠 맛 나는 문체는 여전하다.

한국문학은 평론가 김윤식(서울대)교수의 '우리문학 다시 읽기' 라는 평론도 연재하기 시작했다. "소설만 아니라 중진작가들에 대한 비평도 함께 있어야 어울린다" 는 취지에 따라 이번 봄호에서는 이호철씨에 대한 평론을 실었다.

김교수는 "80년대 이념이 사라진 90년대의 문학공간을 젊은 여성작가들의 개인사적인 얘기가 차지했다. 이제 중진들의 복권이 필요한 시기가 됐다. 문학은 층이 두터워야하며, 이를 위해 중진작가들도 분발해야 한다" 고 강조했다.

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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