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화코드 2000] 3.중매 기업화…'부킹' 일반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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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의류회사의 디자인파트에 근무하는 한모(32)씨는 최근 친구들 사이에 신데렐라로 불린다.

평범한 그녀와 안 어울린다 싶을 정도로 '멋진' 남자와 최근 결혼을 전제로 '성공적인 만남' 을 이끌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남자를 소개받은 것은 부모가 강압적으로 끌고간 결혼정보회사를 통해서였다.

'독신으로 사는 것도 방법' 이라던 한씨는 이 회사의 커플 매니저에게 '신장 1백75㎝ 이상에 서울대 출신, 집안 좋고 수입 많은 직장에 다니는 성격좋은 남자' 를 요구했다.

소개를 안받겠다는 속셈에서였다.

놀랍게도 회사측은 컴퓨터를 조회해보더니 '그런 남자가 5명 있다' 며 소개를 해주기 시작했고 두번째로 만남을 가진 이가 '미래의 남편감' 으로 정착된 것.

결혼을 전제로 한 짝짓기 문화는 오랜 역사의 산물. 그러나 이것도 변하고 있다.

결혼판에서 양가 부모와 혼령기에 든 자녀.중매장이가 한 자리에 나와 맞선을 보는 일은 거의 자취를 감췄다.

'사' 자 붙은 신랑감의 리스트를 확보하고 이리저리 규수감을 물색해대던 '마담 뚜' 도 사라지고 있다.

대신 그 자리를 3백여곳을 헤아리는 중매 기업이 차지했다.

규모있는 회사의 정회원(회비를 내고 소개를 기다리는 등록회원)만도 20만명을 헤아린다.

상대방과 먼저 컴퓨터 통신으로 '채팅' 을 해본 뒤 뜻이 통하면 만나는 방식도 서비스하고 있어 부담감도 없어졌다.

주위에서 적당한 배우자감을 소개하는 방식도 달라졌다.

아예 소개하는 이는 만남의 장소에 얼씬하지도 않는다.

이름과 핸드폰 번호를 가르쳐주면 두 사람이 서로 연락해 만남을 갖는다.

첫 만남 이후 다시 한 번 만남을 갖는 것은 불문율처럼 된 예의다.

여러번 만남을 통해 '배우자 감' 이라는 확신이 들면 그때서야 부모는 물론 소개해준 이에게도 얘기를 한다.

공개적으로 이성을 찾기도 한다.

몇 쌍의 남녀가 출연해 방청객 앞에서 서로를 탐색하다 짝을 찾는 TV 프로그램 '사랑의 스튜디오' 는 젊은이들 사이에 인기가 높다.

연애판에서는 소위 '부킹' 이 대유행이다.

골프장의 예약을 뜻하던 이 단어는 유흥장에서 종업원 소개로 합석하게 되는 만남이란 의미로 바뀐지 오래다.

청소년이든 중년 남녀든 부킹을 즐기기는 마찬가지다.

다만 이뤄지는 장소가 청소년들은 커피숍.카페, 젊은이는 락카페, 테크노 클럽, 장년층은 캬바레, 나이트클럽 등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청춘 남녀건 기혼자들이건 부킹은 가볍게 만나고 헤어진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런 부킹은 사이버 공간에서도 이뤄지고 있다.

채팅을 통해 사이버 공간에서 대화하다 실제로 만나는 경우도 많다.

'나를 즐겁게 해줄 유부남 구함' '만나서 즐길 미시' 같은 선정적 제목의 20~40대 짝짓기 사이트도 기승을 부린다.

이런 짝짓기에서는 상대방의 신분에 대해 철저하게 '묻지마' 로 일관된다.

다음의 만남을 위한 통신수단도 집 전화가 아니라 핸드폰이다.

70, 80년대 나이트 클럽에서 웨이터의 주선으로 일부 젊은 남자들이 젊은 여자들만 앉아있는 테이블에 합석하던 것이 이제는 성의 구별없이 퍼지고 있다.

일산 모 나이트 클럽의 웨이터는 "소위 386세대 주부들은 친구들끼리 와 마치 대학시절 미팅 하듯 부킹해달라고 청하는 경우도 있다" 고 귀띔했다.

이화여대 함인희(사회학)교수는 "사회가 현대화되면 될수록 더 자극되는 욕구 중 하나가 사람끼리 친밀성을 맺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이성을 자꾸 만나고 싶어한다.

이런 현상에 상업성이 개입되면서 만남이 이벤트화되는 경향을 낳고 나아가서는 순간적인 쾌락을 쫓는 불건전한 만남으로까지 확대된다.

그러나 현대인의 만남은 풍요속의 빈곤, 즉 만남의 기회는 많지만 만족도는 떨어지는 악순환이 계속돼 점차 사회적 물의를 낳는 일까지 발전한다" 고 말했다.

이제 우리의 짝맞추기는 공개된 장소에서는 오락화, 익명성의 공간에서는 불륜을 잉태할 가능성을 안고 있다.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인 철학박사 이정우씨는 "시공에서 자유로운 사이버 시대에는 사회적.가정적 질서에서도 자유롭다고 생각하기 쉽다" 며 사이버 시대의 새로운 윤리 모색을 강조했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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