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를 찾아서] 1.철원 도피안사 비로자나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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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관심이 크면 궁금한 것도 늘게 마련이다. 그런 궁금증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문화답사의 재미는 더욱 진진해진다. 새천년 새봄을 맞아 우리 문화재를 찬찬히 들여다보는 지상답사 여행을 떠난다.

신철원을 지나 휴전선쪽으로 향하는 4백63번 지방도로를 타고 가다보면 도피안사(到彼岸寺) 표시판이 나온다.

봄기운을 느끼기엔 아직은 이른 들판과 개울을 건너 3백m쯤 올라가면 언덕처럼 야트막한 야산중턱에 신라말기 도선국사가 세웠다는 도피안사(到彼岸寺)가 자리잡고 있다.

새로 지은 자그마한 절집 몇 채와 삼층석탑, 5백50년이 됐다는 느티나무, 그 사이로 토종개 한마리가 어슬렁거리는 도피안사에서 '피안에 세계에 다다른' 느낌을 갖기란 어렵다.

그럼에도 이 곳을 찾은 것은 불상을 보기 위해서였다. 도피안사의 본전인 대적광전(大寂光殿)에는 갸름한 얼굴에 크지 않은 체구의 불상이 모셔져있다.

8각연화대좌-아쉽게도 지금은 단(壇)에 가리워져 윗부분의 연꽃잎만 보인다-에 앉아있는 이 불상은 불상과 대좌가 모두 철로 만들어진 희귀한 예다. 정식이름은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63호).

지금은 어울리지 않는 금칠을 하고있지만 갸름한 얼굴에 띈 미소, 자신감에 찬 모습은 천년을 훌쩍 뛰어넘은 지금도 그대로 살아있다.

대적광전 앞 마당에 자리한 3층석탑(보물233호)도 4각형이 아닌 불상 대좌를 빼어닮은 8각 기단위에 올라있다. 경주 석굴암 앞 삼층석탑과 비슷하다.

도피안사 철불은 내력이 확실하다. 불상 뒷면에 '함통6년(8백65년, 신라 경문왕5년)1천5백명이 함께 연을 맺어 조성했다' 는 명문(銘文)이 있다.

특히 이 철불은 도피안사를 폐허로 만든 한국전쟁이 끝나고 이 지역 관할권이 미군에서 국군15사단으로 넘어온지 얼마 안된 1959년 당시 이명재(李明載)사단장이 땅속에 묻힌 불상이 갑갑하다고 호소하는 꿈을 꾼 뒤 찾아냈다는 범연치 않은 인연을 간직하고 있다.

철불은 금동불이나 석불에 비해 남아있는 것이 드물다. 쉽게 산화되는 데다가 신라말~고려초의 비교적 짧은 기간동안만 유행했기 때문이다. 철불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9세기는 중국에서 선종이 들어오며 불교가 대중화되고 지방호족들이 새 시대를 꿈꾸며 세력을 쌓아가던 시기였다.

도피안사 철불도 바로 이런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것이다.

도피안사 철불은 비로자나불이다.'비로자나는 '빛' , '빛나는 것' 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바이로차나(Vairocana)의 음역(音譯)이다. 비로자나불은 모든 곳을 진리의 빛으로 비추는, 진리 그 자체를 인격화한 부처다.

비로자나불은 불상이 있는 전각의 이름이나 손모양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대웅전이 석가모니불을 주불(主佛)로 하는 곳이듯, 대적광전이나 화엄전(華嚴殿).비로전(毘盧殿)의 주인은 비로자나불이다.

비로자나불은 왼손의 집게손가락 뻗쳐 세우고 이 첫마디를 오른손으로 감싸쥐고 있다(지권인.智拳印). 중생과 부처가 다르지 않고 깨달음과 미혹도 본래 하나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가르침을 어찌 쉽게 깨우칠 수 있으랴. '내년에 다시 올 수 있을까/(중략)/혼자묻고 대답하는 나를/내려다 보던/부처님/갑자기 눈흘기며/대적광전에는 근처에도 못와본 주제에/내년 걱정을 다하고 자빠졌네/혀를 끌끌 차신다' (안덕상 '도피안사 19' 중 부분).

박태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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