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이터도 '벤처형'…공모전 통해 독자노선 개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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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21세기 유망 직종' 중 하나로 꼽히는 큐레이터. 미술대학마다 예술학.미술사학 전공자는 넘쳐나고 최근에는 큐레이터 학과가 신설되기도 했다.

그러나 큐레이터가 되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서울에서도 활발하게 기획전을 여는 미술관은 10개도 되지 않는다. 각 미술관이 고용할 수 있는 큐레이터는 1~2명. 전시 기획자의 꿈은 대학 졸업과 함께 깨지기 십상이다.

출구는 없을까. 최근 '인디(독립)큐레이터' 의 활동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한 미술관의 소속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전시를 기획하는 것이다. 손에 쥔 건 달랑 기획서 한 장. 전시장과 비용.작가 섭외 문제는 혼자서 해결한다.

아이디어 하나로 후원자(투자자)를 찾아야 한다는 점에서 벤처사업가와도 닮았다. 주로 대학을 졸업하고 마땅한 활동 무대를 찾지 못하던 30대 기획자들이다.

이들에게 생기를 불어넣고 있는 것은 공모전이다. 문예진흥원 미술회관이 지난해부터 실시하고 있는 큐레이토리얼 프로그램이 좋은 예다. 당선작엔 1천만원을 지원하여 전시장도 제공해 인기가 높다. 올해는 40명이 응모해 5명이 선발됐다.

지난해에 비해 응모자 수가 두 배 가량 늘었다. '새로운 예술의 해' 추진위원회는 지난달 미술축제전시 기획안을 공모했다. 홍보기간이 짧았음에도 58명이 지원했다. 여기서 뽑힌 16명은 1인당 1천만원이 넘는 지원을 받아 전시를 열게 된다.

보수적인 미술관도 점차 문호개방을 하는 추세다. 성곡미술관은 지난해부터 공모를 받기 시작했다. 학예연구실에 근무하는 큐레이터가 3명이나 되지만 다양한 전시를 열기 위해서다.

미술회관 김찬동 팀장은 "전시기획을 하고자 하는 욕구는 넘쳐나는데 활동 무대가 마땅찮은 우리 미술계의 현실을 반영한 것" 이라고 분석한다.

그는 "그간 큐레이터 지망생은 많은데 좋은 전시기획자를 찾아보기 힘들었다는 지적이 많았다" 며 "공모전을 통해 우수한 기획자가 많이 발굴되기를 기대한다" 고 말했다.

인디 큐레이터들의 활약은 '새로운 피 수혈' 이라는 점에서 기대가 크다.

학연이나 오너의 취향에서 벗어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관람객도 도전적이고 실험적인 내용의 전시를 즐길 수 있다.

'새로운 예술의 해' 공모 결과를 봐도 탄광촌 미술관.홈리스(노숙자)보고서.인사동 육교 설치 프로젝트.아방궁 종묘 점거 프로젝트 등 '비주류' 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미술회관 공모전에 당선된 '이미지 미술관' 의 기획자 이근용(30)씨는 " '인디' 의 장점은 '열려 있다' 는 것" 이라며 "미술관과 달리 소재.장소 등에 제약받지 않는 자유로움이 매력" 이라고 말했다.

인디 큐레이터들의 유일한 등용문이 되고 있는 공모전이 지속적으로 열려야 이들의 작업이 뿌리를 내릴 수 있을 듯 하다.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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