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룸펜 정치계급 선거브로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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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요즘 선거철을 맞아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시민단체와 언론으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고 있다. 비판의 초점은 유권자와 정치인 간의 괴리현상에 맞춰진다.

즉 정치인들은 더 이상 유권자의 이익과 가치실현을 위해 활동하지 않고, 유권자로부터 동떨어져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괴리현상을 야기하는 이기주의적 정치인을 가리켜 서구에서는 오래 전부터 정치계급이라는 용어로 표현했다.

정부.의회.정당 등에서 일정한 지위를 지니고 활동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 계급에 속하며, 이들은 이미 별도의 사회계급으로 성장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우리에게도 물론 이러한 정치계급이 존재하며, 특히 선거철에는 자신들의 이기주의적 행태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는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이들 일반적 정치계급 외에도 또다른 정치계급이 있다. 선거브로커라 불리는 룸펜(놈팽이) 정치계급(Lumpen Political Class)이 그것이다. 선거브로커들은 과거 권위주의 체제로부터 민주주의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위로부터' 구성되고, '아래에서' 활동해온 특수한 정치계급이다.

이들은 자신이 지닌 정치적 역할과 사회적 위상에서 볼 때 룸펜 정치계급으로 지칭될 수 있다. 과거 군사정권은 자신들의 권위주의 체제를 민주주의 체제로 정당화하기 위해 각 정당의 의사결정 과정에 이 계급을 급조해 참여시켰으며, 나중에는 대통령.국회의원.지방자치단체 선거에서 선거운동원 혹은 참모로서의 활동을 통해 다양한 부패를 자행해 왔다.

이들은 주로 지구당이나 중앙당의 창당 혹은 당원대회 등에서 당원들을 동원하거나 조직화하는 데 기여하며, 이를 통해 정당민주주의의 외형적 정당화라는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선거시 입후보자들은 유권자 동원을 거의 전적으로 이들에게 의존한다. 이들은 일정 수의 유권자 조직을 상시 혹은 부정기적으로 운영하면서 이 조직을 통해 지지캠페인을 벌인다는 조건으로 입후보자에게 일정액의 금품을 요구한다.

여기서는 입후보자가 어느 정당에 속해 있는가 하는 점은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만약 후보가 이 제의를 거부하면 선거브로커는 자기의 조직망을 통해 그 후보에 대한 반대 캠페인을 벌여 나간다.

그래서 입후보자들은 이들의 제안과 요구를 거절할 수 없다. 비선거기에도 이들은 지역구위원장에게 다음 선거를 대비해 지지운동을 조금씩 해나가기 때문에 이들은 그 후보에게 항상 조직관리비나 홍보비용을 요구한다.

지역구 유권자들이 후보들로부터 향응이나 금품을 받는 것도 룸펜 정치계급을 통해 이뤄진다. 이는 바로 고비용 정치와 타락선거의 직접적 원인이 된다.

그런데 룸펜 정치계급의 활동과 관련해 재미있는 변화는 이들 중 일부가 지방자치제의 실시와 함께 기초단체 의원으로 선출돼 활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소규모 식당이나 부동산 중개업과 같은 자영업을 행하면서 전문 선거운동원으로의 활동을 통해 수입을 올리던 이들이 이제는 공인(公人)으로서의 직위도 동시에 갖고 있다는 점이다.

문제는 이들 룸펜 정치계급이 군부 권위주의체제 아래에서 인위적으로 조성됐지만 그 후 민주주의체제 아래에서도 여전히 이전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당내 민주주의를 통한 풀뿌리 민주주의 실현은 이들 룸펜 정치계급의 근절 없이는 불가능하다.

선거철을 맞아 활동이 두드러진 시민단체는 그간 국회의원과 같은 '제1정치계급' 에만 표적을 두고 활동해 왔지만 이제부터는 '제2정치계급' 인 룸펜 정치계급의 근절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물론 관련 국가기구도 여기에 적극 동참해야 할 것이다.

박병석 <중앙선관위 선거연수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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