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수류탄에서 원자로까지 (6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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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63) 울며 겨자 먹기

1984년 당시 국제 원자력시장은 한국처럼 원자력 기술자립을 추구하는 나라에게는 상당히 유리한 상황이었다. 소위 선진 원자력 기술을 보유한 나라들이 기술을 팔 데가 없어 치열한 판로(販路)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여건이니 미국.프랑스 등 외국의 원자력 회사들은 우리가 제안한 공동설계안을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했다. 우리는 이들 회사에 "경수로(輕水爐)핵연료 국산화사업에 참여하려면 공동설계를 해야 한다" 고 통보해 놓은 상태였다.

다시 말해 우리 과학기술진과 외국 기술진이 처음부터 반반씩 핵연료를 설계하되 설계 기술은 별도의 비용을 지불하지 않아도 설계를 하면서 우리에게 가르쳐 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외국 회사들은 처음에는 어이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국제 원자력시장이 워낙 불황이라 '울며 겨자 먹기' 로 우리 사업에 참여하겠다고 나섰다.

84년 12월 입찰(入札)에 응한 회사는 3개국 5개 회사였다. '원자력의 원조' 로 불리우는 웨스팅하우스.컴버스천엔지니어링 등 3개의 미국 회사와 독일 지멘스 그룹의 카베유사(社), 프랑스의 프라쥐마사 등이었다.

나는 먼저 대덕(大德)공학센터와 핵연료주식회사에 속해 있는 40명의 과학기술자들로 평가단을 구성해 이들이 협력회사를 최종 결정하도록 했다. 당시 나는 평가단에 세 가지 평가 기준을 제시했다.

기술 이전.기술 수준.경제성 등에 대한 평가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번 기회에 나는 경수로 핵연료 생산기술을 완전히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겠다고 마음 먹었기 때문에 기술 이전을 무척 중시했다.

또 기술 이전도 중요하지만 기술 수준이 떨어지면 문제라고 판단해 어떻게든 세계적인 수준의 기술을 확보하려 했다.

이와 함께 예산도 충분치 못했으므로 경제성도 냉정히 따져보려 했다.

내가 이같은 평가 기준을 제시하자 평가위원들은 "어떻게 기술 이전.기술 수준.경제성 등 세 가지를 함께 평가할 수 있느냐" 며 "도저히 불가능하다" 고 난색을 표했다. 나는 이들에게 "입학시험처럼 하라" 며 구체적인 방법을 일러 주었다.

"먼저 세 분야를 평가할 수 있는 구체적인 항목들을 만들어라. 각 항목별로 담당 평가위원들이 1백점 만점으로 점수를 매긴 다음 가중치(加重値)에 따라 점수를 다시 환산하면 된다. 마치 입학시험에서 영어 2백점, 사회 1백점, 한문 30점 등 과목별로 점수 비중을 달리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

이어 나는 "이런 식으로 총점을 계산해 가장 많이 점수를 받은 회사를 우리의 기술도입선으로 선정하면 된다" 고 말했다. 그제서야 평가위원들은 내 말을 이해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끝으로 "평가의 정확성을 위해 가중치를 정한 사람은 절대 평가위원이 될 수 없다" 는 단서를 붙였다.

사실 이같은 방식은 처음 시도하는 것이었다. 과거에는 정부 관련부처와 사업주관 단체 등의 기관장들이 모여 결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자연히 정치적 입김이나 외교적 압력이 작용하곤 했다. 그러나 나는 관례를 따르지 않고 과학기술자들로 구성된 평가단에 전권을 위임했다.

나는 그들이 평가에 착수하기 전 "여러분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 결정에 따르겠다" 고 약속했다. 평가위원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기술도입선을 결정한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듯 자못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제까지 연구에만 몰두해 왔지 한번도 경영과 관련된 중요한 결정을 내려본 적이 없는 그들로서는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5개 회사가 보내온 기술자료는 산더미처럼 많았다. 기가 질릴 법도 한데 그들은 오히려 신바람이 나 밤샘 작업에 들어갔다.

한필순 전원자력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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