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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화로 그린 리스트, 크로키로 그린 리스트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41호 04면

피아니스트 한 명은 ‘차가운 추상화’를 그렸고, 다른 한 명은 ‘크로키’를 그렸다. 이틀간 연달아 프란츠 리스트(1811~86)의 작품을 선택한 연주자들이었다.
15일 오후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 선 백혜선(44)씨는 리스트의 소나타 b단조를 연주했다. “리스트는 문학 작품에서 특별한 면을 발견해 음악에 반영하곤 했죠. 이 작품에서도 굉장히 많은 목소리가 나옵니다. 아담과 이브의 소리, 파우스트의 모습 등을 그린 듯해요.” 백씨는 연주에 앞서 마이크를 잡고 청중에게 작품을 꼼꼼히 설명했다.

15일 예술의전당 백혜선 vs 16일 예술의전당 박종훈

연주 또한 분석적이었다. 이 소나타는 30여 분 동안 조성이 15번, 빠르기 지시말이 12번, 박자표가 17번 바뀌는 복잡한 작품이다. 백씨는 “수많은 아이디어를 통일성 있게 묶어내는 것이 피아니스트들의 숙제”라며 건반에 손을 올렸다. 각기 다른 주제들이 선명하게 살아났고, 뒷부분에 다시 나오는 악상 또한 유기적으로 흘러갔다. 수많은 음악적 주제가 제시되고 소멸하는 관계를 정확한 도표로 그려서 설명해주는 듯한 연주였다.

16일 같은 장소에는 박종훈(40)씨가 ‘초절기교 연습곡’ 12곡 전곡을 골라 무대에 섰다. 제목처럼 ‘초월적’으로, 또는 ‘끔찍하게’ 어려운 작품들이다. 작곡ㆍ편곡으로 영역을 넓히고, 재즈ㆍ가요 등을 다루는 연주자로 변신 중인 박씨는 자유롭게 리스트를 해석했다.

거대한 화음이 반복되거나 수많은 음표를 한꺼번에 연주해야 하는 연습곡에서 박씨는 세부적인 기교보다는 전체적인 음악에 집중했다. 간혹 정확하지 않은 음, 불안한 리듬 등이 나왔지만 박씨는 개의치 않았다. 그보다는 자신의 느낌, 직관을 즉흥적으로 풀어놓는 데 신경을 썼다. 움직이는 사물을 스케치한 그림과 같은 연주가 완성됐다.
한 작곡가에 대한 두 피아니스트의 판이한 생각이 연 이틀 청중을 즐겁게 했다. 완벽한 안정감에서는 백혜선씨가, 새로운 영감과 관능미에서는 박종훈씨가 앞섰다.

두 피아니스트의 서로 다른 색깔은 앙코르에서도 이어졌다. 백씨는 앙코르 곡으로도 리스트의 작품 두 개를 더 들려줬다. 콘서트용 연습곡 중 ‘숲 속의 속삭임’과 ‘리골레토 주제에 의한 패러프레이즈’였다. 박씨는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전 악장을 앙코르로 연주했다.

눈앞에 회화적인 분위기를 그려내는 데 있어서도 두 피아니스트가 달랐다. 백씨는 꼼꼼하고 차분하게, 박씨는 굵은 선으로 간략하게 각각 숲과 달빛을 그려냈다. 백씨의 숲이 상냥하고 자세하게 청중의 시야에 들어왔다면 백씨의 달빛은 희미한 윤곽으로 빛을 뿜었다.

리스트는 두 연주자 모두가 애정과 전문성을 가진 작곡가다. 백씨는 리스트의 ‘사랑의 꿈’과 ‘초절기교 연습곡’ 중 몇 곡 등을 모아 리스트 음반을 2003년 발매했다. 백씨가 한 작곡가의 음악으로 앨범을 만든 것은 리스트가 유일하다. 한편 박씨는 리스트 해석의 권위자로 손꼽히는 라자르 베르만의 제자다. 그는 “베르만에게 ‘적극적이고 거침없는 표현’을 배웠다”며 “재거나 감추는 것 없는 음악적 표현”이라고 설명했다. 백씨가 리스트의 문학적이고 분석적인 면을 발견했다면 박씨는 작곡가의 본능과 직관을 간파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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