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핀란드의 여성 대통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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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우리가 독립을 되찾으려고 일제에 항거하며 피를 흘렸던 3.1운동 81주년인 오늘 핀란드는 첫 여성 대통령을 맞는다.

외무장관이던 타리야 할로넨 여사가 오늘 제 11대 핀란드 대통령으로 취임식을 갖는다. 할로넨 대통령이 세계 최초 또는 유일한 여성 대통령은 아니다.

사실 여성이 대통령 또는 총리가 되는 것은 이제 전세계적으로 그리 드물지 않게 접하는 현상이다.

아일랜드가 최근 2대째 여성 대통령을 배출했는가 하면 인도의 네루, 이스라엘의 골다 마이어, 스리랑카의 반다라나이케, 노르웨이의 브룬틀란트, 파키스탄의 부토 등 총리를 역임한 여성의 수는 이루 헤아리기 어렵다.

성차별 의식이 유달리 뿌리 깊은 우리 한국을 벗어나면 여성이 대통령 또는 총리가 됐다는 소식은 이제 그리 신기한 일로 여겨지지도 않는다.

할로넨 대통령의 취임이 우리에게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가 대통령이 되기까지 쌓아온 개인적 경륜과 핀란드라는 나라가 밟아온 역사적 발전과정의 모범적 성격 때문이다.

유력자인 아버지 또는 남편의 후광을 입어 권좌에 오른 여성들과 달리 할로넨 대통령은 헬싱키의 노동자 거주지역 출신으로서 총리 비서직에서 출발해 사민당 출신 시의원.국회의원을 거치며 사회보건부 장관.북부협력부 장관.법무 장관을 역임한 뒤 1995년 리포넨 내각의 외무부 장관으로 발탁된 인물이다.

능력이 있는 한 여자냐 남자냐가 문제되지 않을 뿐더러 한 사람이 여러 부서의 장관직을 돌아가며 맡아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인권에 대한 절대 존중과 철저한 평등주의를 이상으로 하는 사회민주당 주도의 연합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핀란드의 묘한 민주주의 정치풍토 때문이다.

그렇다고 할로넨 대통령이 여성으로서 예외적인 정치적 생애를 살아온 것도 아니다. 대통령을 직선제로 뽑기로는 겨우 두번째였던 이번 선거에는 할로넨 외무장관 말고도 교육부 장관과 국회의장을 지낸 우오수카이넨 여사와 국방장관을 지냈고 1995년 대선에서 근소한 차이로 아흐티사리 대통령에게 패배했던 엘리자베스 렌 여사 등 두명의 또다른 유력한 여성 후보가 출마했었다.

2년전만 해도 할로넨 장관을 대통령 후보로 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완전독립을 하기 전인 1906년에 이미 자치의회 선거에서 여성참정권을 인정했던 핀란드는 벌써 그 해에 의원의 10%를 여성으로 채웠으며 근년에는 국회의원의 35~40%가 항상 여성이었으니 제2, 제3의 할로넨이 얼마든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여성의 높은 사회참여율과 고위 정치직 진출에 대한 핀란드인들의 설명은 한결 같다. "5백만밖에 안되는 우리가 인구의 절반인 여성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지 않고 어떻게 발전할 수 있겠습니까□"

핀란드의 국가발전의 역사는 진실로 눈물겹고도 눈부시다.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스웨덴의 변경지방에 불과했던 핀란드는 그후 1백년간 러시아제국 내에 편입돼 살았으며 19세기 중엽에야 비로소 핀란드어를 스웨덴어와 함께 공식언어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러시아가 혁명의 혼란에 빠졌던 1917년 말 재빨리 독립을 선포한 핀란드는 내란과 수차례에 걸친 침략을 막아내며 독립을 지켜냈지만 2차세계대전이 끝났을 때는 영토의 상당부분을 소련에 빼앗기고 엄청난 전쟁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특별히 풍부한 자연자원을 보유하고 있지 못한 추운 북쪽지방에 위치한 핀란드의 국민은 70년대까지만 해도 먹고 살기가 어려워 헐값의 임금을 받으며 외국으로 팔려나가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경제적으로 고르게 잘 사는 모범적 사회민주주의 국가를 이룩하고 있다.

인구가 우리의 9분의1 밖에 되지 않는 핀란드의 국제적 위상은 우리를 앞서고 있으며 정치적 부패를 모르고 정직함에서 누구의 추종도 불허하는 핀란드 국민의 자긍심은 종족주의의 위험을 낳을 정도로 드높다.

핀란드의 눈부신 발전이 모두 여성인력을 잘 활용한 덕분 때문만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핀란드의 성공사례는 적어도 여성의 활발한 사회진출과 고위직 기용이 결코 국력강화와 사회적 발전에 걸림돌이 되지 않음을 증명하기엔 충분한 것이 아닌가 싶다.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또다시 정치적 난장판이 벌어지고 있는 오늘 핀란드의 여성대통령 취임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이인호<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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