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공동정권 실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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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1997년 대선을 매개로 시작됐던 초유의 공동정권 실험은 4.13총선을 앞두고 좌초했다.

공동정권의 모태였던 97년 11월 3일의 양당 합의문은 내각제 약속을 골간으로 실상 '대선후보 DJ, 총리 JP' 와 대선용 지역연합에만 초점이 맞춰졌던 게 사실.

정책.이념적 기반이라고는 '민주화와 근대화 세력 결합' 의 선언적 수사(修辭)만 있었을 뿐이다. 색깔다른 두 당이 다양한 국정사안을 어떻게 조율할지에 대한 정교한 틀은 전무했던 셈이다.

자민련 경제팀의 IMF 위기극복 기여, 대북 포용정책에 대한 자민련의 안전판 역할은 공동정권의 치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반면 양당은 국가보안법.교원정년.국민연금.대북 포용정책 등 정책분야에서 마찰을 빚었고 김영배(金令培) 전 총재권한대행 등 민주당 지도부가 분노한 JP에 의해 물러나야 하는 부작용도 있었다.

DJP의 유대로 근근이 유지돼 왔던 공동정권은 그러나 지난해 7월 내각제가 무산되고 합당이 물건너가면서 '결별' 수순에 돌입한 셈이다.

연립정권이 빈번한 일본?경우 오부치(자민당)-오자와(자유당)합의에서 보듯 사전에 공약.정책합의의 틀을 갖추고 결별 또한 분명한 '합의 위반' 에서 찾는 게 관례. 반면 자민련이 '내각제 무산' 과 함께 결별 명분으로 내건 시민단체 낙천운동, 이인제(李仁濟)선대위원장 충남 출마, 민주당의 운동권 공천 등은 97년 합의와는 무관하다는 점에서 대비를 이룬다.

공동정권의 부실한 토대와 함께 자민련의 소수당 전락에 대한 위기감 또한 실패를 맞은 주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자민당과 연립한 일본사회당이 정체성 위기 속에 제5당으로 전락했던 전철을 밟지 않으려는 자민련 총선전략의 일환이 아니냐는 얘기다.

[공동여당 관련 주요 일지]

▶1996년 5월 4일〓DJ.JP 국회 단독회동, 공조 처음 논의

▶97년 7월 11일〓한광옥.김용환 공식 협상 착수

▶97년 11월 3일〓양당 후보단일화 선언

▶98년 12월〓정계개편설로 내각제 개헌 갈등

▶99년 1월 5일〓DJP 청와대 회동 신뢰 확인

▶99년 7월 17일〓DJP 워커힐 회동 합당논의

▶99년 7월 21일〓DJT 회동 내각제 개헌 유보 합의

▶99년 12월 22일〓DJP 회동 합당불가 및 공조 재확인

▶2000년 1월 20일〓민주당 창당, 내각제 강령 배제

▶2000년 1월 24일〓JP 총선시민연대 낙천명단 포함. 자민련, 음모론 제기

▶2000년 2월 22일〓이한동, 자민련 야당 선언

▶2000년 2월 24일〓JP.이한동 공동여당 포기 선언

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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