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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전당 주변 뒤풀이 명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7면

허겁지겁 공연장으로 달려오느라 물 한잔 제대로 마시지 못했던 관객, 막 내린 텅빈 객석을 뒤로 하고 '뒤풀이' 로 허전한 가슴 달래고 싶은 예술가들이 공연이 끝난 후 마주치는 곳이 있다.

무대와 객석이 비로소 하나가 되는 이 곳은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앞 삼거리에서 걸어서 5분 거리인 '숙자네' (대표 유숙자.02-585-5659)다.

예술의전당을 내집처럼 드나드는 음악인.연기자들이 이 식당을 모르면 '간첩' 이다. 바깥에서 보면 창문과 벽이 온통 포스터로 가득해 책방인줄 알고 발걸음을 돌리기 십상이다.

메뉴는 극히 서민적이다. 부대찌개 6천원, 돼지생고기 7천원, 전주콩나물국밥 4천원, 모듬 스테이크 1만5천원. 특히 호주머니가 가벼운 연극인들이 공연 끝난 후 자주 찾는다.

벽면엔 메뉴판과 함께 이곳을 다녀간 아티스트들의 자필 싸인이 적힌 공연 포스터로 빼곡하다. 대학로 소극장 연습실과 주점을 합친 느낌이다.

예술의전당의 공연 역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살아있는 박물관' 인 셈. 음악.연극.무용계 인사들과 무대 스탭.관객이 주로 애용한다.

단골 손님은 연극배우 윤석화.피아니스트 노영심.지휘자 이진권(서울심포니 음악감독).장일남(한양대 교수), 테너 안형일.임웅균, 뮤지컬 배우 남경주.허준호, 개그우먼 이영자, 연출가 윤호진, 재즈가수 윤희정, 전자 바이올리니스트 유진 박 등. 가수 이문세씨도 장모인 현대무용가 육완순씨를 모시고 자주 들린다.

피아니스트 백건우.영화배우 윤정희 부부도 예술의전당 공연이 끝나면 꼭 들러 고향의 서민적인 분위기에 흠뻑 빠진다.

공연장의 뜨거운 감동을 한 잔의 소주로 식히는 사람, 예상 밖으로 흥행에 실패해 가슴을 쓸어내리는 공연 관계자, 전석 매진으로 축배를 드는 사람들…. 출연진과 관객 사이에 격의없는 대화로 번지면 중간 휴식시간에 다 털어놓지 못한 매니어들의 '공연평' 이 난무하고 싸인공세도 벌어진다.

다른 음식점과 달리 밤 10시부터 사람들이 북적인다. 오늘 막이 오르는 '명성황후' 처럼 대형 뮤지컬이 상연되는 기간에는 발디딜 틈도 없다.

영업시간은 자정까지지만 분위기를 감안해 30분~1시간 연장되기 일쑤다. 지난 23일 밤엔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공연중인 소극장오페라페스티벌 스탭.출연진들까지도 뒤풀이를 하느라 장충동에서 한강을 건너 이곳에 왔다.

오페라 연출가 장수동씨는 "한번 이곳에 발을 들여 놓은 손님들은 언제든 부담없이 이곳을 다시 찾게 된다" 고 말한다. 예술의전당 인근에서 자정까지 간단한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 거의 없다는 이유도 있지만 이 곳의 독특한 분위기가 좋아서란다.

5년째 이곳 '공식 뒤풀이 장소' 로 삼고 단골처럼 드나드는 김홍기 프라임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장은 "세월이 흘러도 언제나 한결같은 분위기" 라며 "무대에서의 긴장과 스트레스를 말끔히 해소하고 내일 공연을 위해 충분히 영양을 섭취하는 음악인들의 사랑방" 이라고 말한다.

93년 식당을 연 대표 유숙자씨의 남편 홍순재(50)씨는 연세대 국문과를 나와 국어 교사를 하다가 '자유' 를 찾아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홍씨는 " '명성황후' 의 뉴욕 공연 당시 연출가 윤호진씨에게 영문으로 축전을 보냈더니 공연을 앞두고 큰 격려가 됐다며 축전을 다시 가지고 와서 벽에 붙여 놓았다" 며 흐뭇해 하면서 "식당.커피숍.공연장.연습실을 갖춘 연극인의 사랑방을 꾸미고 싶다" 고 꿈을 펼쳐보인다.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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