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세종시법 반대해 의원직 던졌던 박세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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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일 한반도선진화재단이사장은 2005년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특별법(세종시법)이 국회를 통과한 데 반발, 국회의원(한나라당 비례대표)직을 던졌다. “국가적 재앙이 될 ‘수도분할법’을 막지 못한 책임을 통감해 더 이상 의원의 책무를 수행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특정 정책이 소신과 맞지 않는다고 의원직을 던진 건 이례적이었다. 당시 그는 “세종시가 행정도시가 아니라 기업도시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지금 그는 무슨 생각을 할까. 서울 충무로에 있는 재단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박 이사장은 “이 정도의 문제도 정치 지도자들이 풀지 못하고 개인적·정파적 이해에 얽매여 국민을 혼란시키는 정치에 실망했다”고 토로했다. 친 이명박계-친 박근혜계 간 갈등엔 “국가의 중차대한 정책 사안을 권력투쟁의 수단으로 삼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세종시 문제를 올바로 푸는 걸 통해 우리 사회와 정치가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2005년 의원직을 사퇴한 건 오늘의 혼란을 예견했기 때문인가요.

“평생 국가발전 전략을 연구해 온 사람으로서 국익이 크게 훼손될 것을 뻔히 알면서 지지할 순 없었습니다. 또 한나라당이 협력해 국회를 통과했기 때문에 역사엔 여야 모두가 찬했다고 기록될 텐데 후손을 위해 누군가는 ‘아니다, 크게 잘못된 것’이란 기록을 남겨야 했습니다.”

-당시 박근혜 대표는 ‘한나라당이 2003년에 당론으로 국회를 통과시킨 걸 뒤집을 수 없다’며 권고적 찬성 당론을 이끌었습니다.

“박 전 대표도 잘못된 안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절차적 정당성이 있어서 뒤집기는 어렵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정치는 현실이란 말도 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국가의 백년대계와 직결되는 중차대한 문제이자 망국적 정책이라고 봤습니다.”

이 대목에서 그는 2005년 3월 2일 마지막으로 참석했던 한나라당 의원총회를 언급했다. 그때 그는 “여당(열린우리당)엔 표를 가져올지 모르나 국가엔 재앙을 가져올 잘못된 정책에 우리가 동의해 줬다. 공당이 동의해 주고 입장을 바꾸는 건 정치적 죽음이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죽어서 나라를 살릴 수 있다면 그 길을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근 정치권의 세종시 논쟁은 어떻게 보십니까.

“실망을 넘어 좌절감을 느낍니다. 당시엔 상황논리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하더라도 이제는 합리적 대안으로 잘못된 정책을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국가의 중차대한 정책마저 정쟁과 권력투쟁의 수단으로 삼으며 국민을 호도하 는 걸 보면서 앞으로 우리 정치가 나라를 올바로 끌고 가지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모든 정치인이 반성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서울시장 시절 수도 이전에 반대했는데 지난 대선 때 슬쩍 넘어갔어요. 그동안 세종시 문제에 대해 확실한 입장을 취하지 않아 국민을 불안하게 한 것에 대해 빨리 반성하고 사과해야 합니다. 박근혜 전 대표도 정부가 합리적 대안을 만들겠다고 하면 그 안을 기다려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대안도 나오기 전에 ‘원안+알파’ 등의 발언은 적절하지 못했습니다.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도 2002년 대선 땐 수도이전에 반대했던 분 아닙니까. 정치권은 합리적 대안이 마련될 때까지 정쟁을 중단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대통령 선거에 재미 보기 위해 세종시 문제를 만들어 엄청난 국론분열을 일으킨 장본인들부터 국민 앞에 사죄해야겠지요.”

-세종시 문제를 풀기 위해 대통령이 전면에 나서야 할까요.

“직접 나서야 합니다. 그 지역 발전과 국가이익을 위해 왜 세종시 원안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지를 국민께 정성을 다해 설명하고 혼신의 노력으로 설득해야 합니다. 개인이든 조직이든 잘못된 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것을 알면 반성하고 빨리 고치는 게 진정한 지도자의 용기입니다. 그러면 우리 국민은 국익을 생각하는 지도자의 진정성을 인정할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국가 지도자의 한마디가 역사와 다음 세대에 전범(典範)이 된다는 점을 결코 잊어선 안 됩니다. 공명정대해야 하고 특히 자신에 대해 더욱 엄격해야 합니다.”

-정치인들이 표에 신경 쓰는 걸 폄하하는 건 지나친 이상론 아닌가요.

“부도덕하다고 할 순 없겠지요. 하지만 지도자라면 금도가 있어야 해요. 국익을 훼손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표만 생각하는 것은 지도자가 갈 길이 아니지요. 아예 앞으로 통일수도는 연기-공주로 한다는 국민투표를 하고 모두 다 내려가는 것이라면 차라리 낫습니다. 수도 분할은 수도이전보다 더 나쁩니다.”

-정부 부처를 이전하지 않는 대안에도 박 전 대표가 수긍할까요.

“말을 쉽게 바꾸는 우리 정치풍토에서 신뢰와 약속을 중시하고 지키려는 것은 박 대표의 미덕이고 장점입니다. 그러나 약속을 지키는 것은 작은 진리이고, 국익을 지키는 것은 더 큰 진리입니다. 나는 정부가 합리적 대안을 만들어 내면 박 대표도 수용하리라 봅니다. 애국심이 있는 지도자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국민투표가 좋은 해결 방안이 될까요.

“가능한 한 거기까지 안 가길 바랍니다. 그건 정치가 더 이상 기능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정치실종 내지 파산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정부가 최선의 합리적 안을 제시했는데도 정치권이 정파적으로 악용한다면 최종적으로는 국민이 나올 수밖에 없겠지요.”

- 세종시 대안이 있습니까.

“선진국이 되려면 지구촌에 글로벌 메시지를 줘야 합니다. 그러려면 국제기구를 많이 유치해야 합니다. 아시아에도 머지않아 유럽연합 같은 아시아연합(AU)이 생길 텐데 그때를 대비해 사무국을 유치할 수 있는 인프라를 깔고 대비를 해야 합니다. 브뤼셀이 유럽의 수도인 것처럼 세종시가 아시아의 미래수도가 될 수 있어요. 전 세계 NGO의 국제연대기구, ‘United NGOs’를 만들어 사무국을 세종시에 둬, 총회를 유치하고 세계적 NGO 활동가들을 훈련시키는 것 등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정민 정치부문 부장대우, 사진=박종근 기자

박세일은

‘학자 박세일’이 걸어온 궤적은 개혁이란 화두와 맞닿아 있다. 김영삼 정부 때 청와대 정책기획·사회복지수석을 지내면서 로스쿨 설립 등 사법·교육 개혁, 노동법 개정 같은 굵직한 개혁 작업을 주도했다. 국가전략으로 ‘세계화’라는 화두를 제시한 것도 그였다. 개혁성향의 학자들을 규합,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란 시민단체를 만들어 새로운 형태의 시민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17대 국회 때 박근혜 대표의 제의로 한나라당에 들어가 정책위 의장·여의도연구소장을 맡았으나 세종시법 이견으로 1년여 만에 의원직을 던졌다. 다시 대학(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으로 돌아간 그는 요즘 ‘선진화’ 전도사로 활약 중이다. 서울대(법대)에서 공부했고 미국 코넬대에서 석사(노동경제)·박사(법경제) 학위를 받았다. 6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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