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공짜 오페라 보러 백화점 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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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12일 신세계백화점 본점에서 공연된 오페라 ‘세빌리아의 이발사’ 중 한 장면. [최승식 기자]

12일 오후 서울 충무로 1가 신세계백화점 본점 10층. 식당가 옆에 긴 줄이 생겼다. “10분 후 입장하겠습니다.” 진행 요원의 말에 300여 명의 대기자가 일순 긴장했다. 이들이 기다린 것은 로시니의 오페라 ‘세빌리아의 이발사’. 350석 규모의 신세계 문화홀에서 열린 이 공연은 선착순으로 청중을 들였다.

오페라는 보통 2000석 이상의 홀에서 열린다. 백화점 문화홀에서 오페라 공연이 정식으로 열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하이라이트 음악만 모아 공연하거나 짧게 만든 작품이 아닌, 의상과 무대 장치를 갖춘 공연이었다. 작품을 제작한 서울시오페라단의 조준수 기획 담당자는 “백화점에서 오페라 전막(全幕) 공연을 제의해 놀랐다. 작은 무대를 최대한 활용하도록 배경만 약간 바꿨다”고 설명했다.

신세계 문화홀의 최근 공연은 이처럼 일반 공연장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신영옥·유현아(소프라노), 김남윤(바이올린), 정명화(첼로), 김대진(피아노), 최현수(바리톤) 등 내실 있는 연주자 300여 명이 다녀갔다.

그렇다고 연주자의 유명세에 기대는 이벤트 공연은 아니다. 지휘자 정명훈이 오랜만에 피아니스트로 돌아온 것이 이 백화점에서였다. 기타리스트인 둘째 아들 선(27), 더블 베이스를 다루는 셋째 민(25)씨와 함께 2007년 11월 문화홀에서 공연했다. 전문 공연장에서도 나온 적 없는 아이디어였다.

◆마케팅 효과=이 백화점 문화홀이 ‘이벤트’ 대신 클래식 공연을 시작한 것은 2007년 3월이다. ‘상품만 팔면 성장이 멈춘다’는 생각 아래 문화홀에서 하던 할인 행사, 상품 판매 등을 없앴다. 하지만 첫 공연 땐 객석 3분의 2가량이 비었다. 백화점 속 정통 클래식 공연을 고객들이 낯설어했던 탓이다. 이후 공연 기획사, 외부 공연장 등 150여 곳의 협력사와 전문가 자문위원을 구성했다. 공연에 온 고객의 데이터베이스도 구축했다. 시작 반년 만에 청중이 만원을 이루게 됐다. 지난해엔 백화점 연주를 꺼리는 클래식 연주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콘서트용 야마하 피아노와 음향 반사판, 스피커를 들여놨다. 모두 2억원가량 들었다.

공연은 모두 무료다. 연주자의 출연료 전액을 자체 예산에서 지급하는 만큼 ‘결단’이 필요한 사업이다. 마케팅사업부의 권영규 부장은 “클래식 음악 대중화의 필요성을 설득하며 출연료를 ‘협상’하는 것이 가장 큰 관건”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2년 관련 예산이 30% 정도 늘어났다. 백화점 측은 최근 “문화홀 이용 고객의 1년 구매금액이 640만원으로 일반 고객(100만원)의 여섯 배가 넘는다”는 분석 자료를 내놨다.

◆기획공연 확대=내년에는 탄생 200주년을 맞는 작곡가 쇼팽·슈만을 테마로 공연을 기획하고 있다. 좀처럼 무대에 설 기회가 없는 신진 연주자들에게도 기회를 준다. 신세계백화점의 마케팅담당 장재영 상무는 “올해 50억원을 공연에 쓰고 있다”고 밝혔다. 서울 예술의전당 공연·음악부 1년 예산(50억원)과 비슷한 수준이다. 할인 상품을 판매하던 백화점의 ‘행사장’이 공연계의 주목할 만한 경쟁자로 떠오르고 있는 셈이다.

김호정 기자, 사진=최승식 기자

◆신세계백화점 본점 문화홀=2005년 10월 개관한 백화점 신관의 10층에 있다. 350석 규모의 무대에서 클래식 음악은 물론 뮤지컬·대중 음악 등을 공연한다. 2007년 이후 1000여 회의 콘서트가 열렸고, 이 중 약 20%가 클래식 무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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