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층은 도시인들의 탈출구…집·카페도 높은곳 인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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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광화문 K빌딩 1층에 근무하는 직장인 P씨(29)는 최근 동료와 어울려 자주 가는 곳이 있다.

서울 도심 한복판 옛 화신백화점 자리에 들어선 종로타워의 맨 꼭대기(33층)에 위치한 탑클라우드. 예약을 하지 않으면 헛걸음을 할 정도로 인기를 끄는 곳이다. 자리 차지가 쉽지는 않지만 그는 올 때마다 사방으로 뻗는 불빛을 보면서 해방감을 느낀다.

"시간 가는 줄 모르겠어요.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것 같아요. " 고급 레스토랑.칵테일 바가 자리잡고 있는 이곳에는 낮에는 40대 전후의 비지니스맨, 밤에는 20~40대 직장인들이 붐빈다.

탑클라우드의 최형만 지배인은 "청와대.광화문이 한 눈에 보인다" 며 "낮에는 인근 탑골공원에서 큰 맘먹고 올라오는 노인들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고 말했다.

남산 서울타워.여의도 63빌딩.COEX 전망대에 이어 종로타워가 들어서면서 도심 야경을 즐길 수 있는 곳이 늘어났다.

보기에도 아찔한 초고층 빌딩 전망대에는 어김없이 탁 트인 정경을 즐기려는 손님들을 붙잡으려는 레스토랑이 자리잡고 있다.

가로등과 네온사인은 하나 둘씩 불을 밝히면서 낮의 지저분한 뒷골목 풍경은 오간데 없고 빌딩 숲이 연출하는 아름다운 밤 풍경에 사람들은 사로잡힌다.

고층 레스토랑을 자주 찾는 회사원 윤선윤(25)씨는 "고층이란 공간은 번잡한 일상에서 해방되는 탈출구 같은 곳이어서 마음 속의 자유를 마음껏 느낄 수 있다" 고 말한다.

아예 이런 즐거움을 주택에서 누려보려는 이들도 늘고 있다.

최근 국내에서도 '아이파크' '하이페리온' '쉐르빌' 등 초고층 아파트 붐이 일고 있다. 꼭대기 층을 기피하던 분위기도 사라졌다.

쌍용건설이 최근 연세대 건축과학기술연구소와 공동으로 서울 수도권 지역 아파트 거주자 2천5백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결과에서 응답자의 41%가 '전망만 좋다면 북향도 상관없다' 는 반응을 보였다.

하얏트.조선.롯데 등 국내 대표적인 호텔이나 서울대병원.서울중앙병원 등 종합병원의 특실도 가장 높은 꼭대기에 있다. 외국에서도 초고층아파트는 윗층으로 올라갈수록 값이 비싸다.

도시인들은 밤이 되면 현기증 나도록 높은 고층 빌딩을 좋아할까. 미국의 위스콘신 메디슨 대학 커뮤니케이션학과 존 피스크교수는 "내려다 보면 아찔한 초고층을 현대인이 찾는 것은 시야가 탁 트여 도심 야경을 즐길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높이' 는 사회계층, 즉 정치적.경제적 권력을 가늠하는 척도라는 것. 그래서 초고층 아파트는 새로운 부(富)의 상징이 된다는 것이다.

고층빌딩의 전망대는 낮과 밤, 일상과 휴식이 교차하는 공간이다. 낮에는 오피스 빌딩에서 최고 경영자가 누리던 '권리' 를 밤이라도 즐기고 싶은 욕망에 다름 아니다.

샐러리맨들은 대부분 오피스 빌딩의 저층에서 근무하다 전망대에서 역전(逆轉)의 쾌감을 맛본다. 도시는 자유와 속박이 혼재하는 공간이다. 고층에서 느끼는 현기증은 자유에 따른 위험부담이다.

연세대 이훈구(심리학)교수는 "도시인들이 주거지와 휴식공간으로 고층을 좋아하는 것은 무엇보다 각박한 현실을 잊게 하는 확 트인 전망이 주는 매력 때문" 이라며 "특히 일상에 억눌려 지내기 일쑤인 현대인들은 마음 속에 깔린 답답함을 덜게해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 고 말한다.

이장직.신용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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