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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무엇을 위한 공천학살인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한나라당의 공천자 발표는 충격적이다. 전국 2백27개 선거구 중 12곳만 제외해 사실상 공천을 거의 매듭지었는데 지역구 현역의원 1백9명의 26.3%에 달하는 29명이 탈락했고 당내의 6, 7선 이상 이른바 원로들은 전원 지역에서 배제됐다. 아마도 한나라당의 현역 중진들에게 이날은 '금요일의 학살' 로 기억될 것이 분명하다.

이같은 엄청난 공천교체는 숫자상으로는 현재의 정치를 전면 교체해야 한다는 국민적 요구에 부응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질적인 정치개혁을 동반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없지 않다.

현재의 한나라당은 '비빔밥 정당' 이다. 지난 대선 때 몰려드는 세력들을 너나할것 없이 끌어모으는 바람에 이념적인 노선이 불분명하고 성향을 달리하는 계파들로 뒤섞여 있다.

그런 점에서 이번 공천과정은 한나라당의 정체성 확립의 계기가 될 수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총재 중심의 '회창당(會昌黨)' 으로 만드는 과정이 되고 말았다.

공천과정에서 계파들의 지분요구는 거의 묵살됐다. YS계니, 이기택(李基澤)계니, 김윤환(金潤煥)계니 하는 당내 계보는 인정되지 않았고 계파 보스조차 공천에서 탈락했다.

李.金계파들이 모두 지역정서를 바탕으로 한 갈라먹기식 구정치 행태의 계파들이었기 때문에 이들 계파의 배제는 구정치 혁파의 뜻으로 인정될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이 공정했는지에 관해서는 이론이 없지 않다. 대표적인 저질의원이 텃밭이라고 할 대구의 중심 지역에서 공천을 따내는 등 이해할 수 없는 점도 있다.

그런 것이 구세력의 거세와 이회창(李會昌)총재에 대한 충성심이라는 기준에서 결정됐다면 이는 또하나의 1인정당으로 가는 퇴행적 발상이라는 비판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또 탈락한 계파 보스들에게는 비례대표와 지역 선대위원장직을 배려해준다고 한다. 이 또한 이해못할 일이다.

그들이 비리혐의든, 또는 구정치적 행태로 인해 배제됐다면 차제에 완전히 정치에서 물러나게 하는 게 마땅할 것이다.

한나라당에 대한 총선시민연대의 물갈이 요구는 40여명으로 각당 중 가장 많았는데 이들 중 17명만 재공천됐다.

이는 민주당보다 한나라당이 오히려 시민연대의 공천개혁 요구를 당내 체질개편에 더 활용한 결과가 됐다.

한나라당은 앞으로 심각한 공천파동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당 지도부가 이를 수습하려면 이번 '대량학살' 이 진정 무엇을 위한 것인지, 그들의 공천기준이 과연 엄정했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적어도 구정치 거물들의 대량교체를 통해 '정치교체' 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이날 현역의원 위주의 재공천을 한 자민련과는 크게 대조되는 모습을 보인 것만큼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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