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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스코치-水] 자유로운 그녀, 시뻘건 다량의 질출혈 그 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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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강일구

화가인 J가 십여년 만에 연락을 해온 것은 한 달 전이다. 유럽의 곳곳을 다니며 그림을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재미나고 자유스러운 생활을 해오던 그녀였다. 굳이 그림을 팔려고 하지 않고 마음이 내키면 선물로도 줘버리는 그녀의 삶에 대한 자신감과 자유분방함이 때로는 무척이나 부러웠던 적이 있었다.

그녀의 전시회에는 그림 속의 풍광만큼이나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로 북적이곤 했다. 눈 내리는 핀란드의 숲길이나 뜨거운 햇살이 비치는 이베리아 반도의 올리브 나무가 고즈넉한 한국의 산사 풍경과 함께 걸리곤 했었다.

자신이 자궁경부암 3기임을 안 것은 최근의 일이라고 했다. 늘상 불규칙한 생활이라 간간히 비치는 부정기적인 질출혈에 둔감했다고 한다. 어느 날인가는 말할 수 없는 피곤함과 함께 간절히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모든 일정을 포기하고 인천 공항에 내렸을 때는 석달 새 빠진 체중이 무려 10kg. 쫒기듯 건강 검진을 하던 날 병원 바닥을 흥건히 적신 시뻘건 다량의 질출혈을 경험하고 하얗게 질린 그녀에게 대학병원에서는 자궁경부암 정밀검사를 권유했다.

40대 초반의 독신인 그녀는 죽음을 생각하기에는 아직 눈부시게 아름답다. 그러나 현실은 상상이상으로 잔혹할 때도 있는 법이다. 자궁과 그 주변 난소, 나팔관, 신경과 동맥, 림프관을 따라 퍼진 암덩어리들을 다 제거해야함은 물론이고 필요하면 소장이나 대장조직 일부까지도 잘라내야 한다. 그리고 또 수회를 거듭해야하는 견디기 힘든 항암제 정맥투여와 방사선치료가 필수이다.

수술을 받기전 그녀는 마지막 소원이라며 일본의 한 온천을 방문하고 싶다고 했다.

라듐이 섞인 화산 용암수에 몸을 담그고 있는 사람들은 한 눈에 보기에도 병색이 완연하다.
유황 연기가 끓어 오르는 온천 위에 나무로 탕치관을 짓고 땅 밑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유황 증기를 직접 쐬며 암세포를 죽이려한다. PH1.2의 철도 녹여내는 강산성 독극물 수준의 온천수에 몸을 담그고 이를 악물고 견디는 그녀를 보며 의사인 내 눈에서도 눈물이 흐른다. 삶에의 뜨거운 애착은 지면을 뚫고 나오는 용암만큼이나 강렬하다.

지구의 에너지, 마그마가 금방이라도 뚫고 나올 듯 포효하는 유황 연기에 숨이 막혀 질식할 것 같은데도 98도로 들끓는 노랗고 푸른 온천수가 튀어 화상을 입을 것 같은데도 그녀는 아랑곳 하지 않는다. 방사능으로 면역력을 높이겠다고 우박이 치는 황량한 바위산에 앉아 있는 그녀를 보며 안타까움과 미안함과 일말의 책임감에 가슴 시린 것은 우리가 20대의 많은 날들을 함께 보낸 친구였기 때문이다.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가 있다면 그 아름답고 활기찼던 열정적인 삶의 시기에 늙은 할머니처럼 잔소리를 해대고 싶다.

“성관계는 늦게 시작할 수록 좋아. 자궁입구나 질에 염증이나 상처가 있으면 성관계는 않는게 좋겠다. 생리때도 될수록 하지 말고…
그리고 무엇보다 제발 콘돔을 안 끼는 남자와는 잠자리를 갖지마! 네 몸에 어떤 나쁜 성병균을,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심어줄지 몰라! 배타적인 성관계를 하도록 해, 여러명의 파트너는 여자인 네게 너무도 나빠. 정말 조심해! 네 남자 친구는 문란했던 성관계의 과거력이 있는 매력남보다는 조금 바보스러워도 착하고 조신한 그런 남자로 고르면 안되겠니? 담배,술 좀 그만 할 수 없니? 밤샘 작업하는 거 그거 좀 줄이고 낮에 일하고 운동도 좀 하고 규칙적인 식생활을 하는 것이 네 몸 면역력을 떨어뜨리지 않는 거야. 성생활 시작했으면 부인암 검사 적어도 3년에 한번은 꼭 반드시 받아야지. 몸에 이상이 있으면 제발 예민하게 신경 좀 써. 통증이 없어도 불규칙한 생리나 질출혈, 냄새나는 분비물도 위험 신호일 수도 있다고!”

가까운 사람을 지켜내지 못한 회한은 유독히 더 씁쓸하다.

돌아오는 여행길에 가까운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병원 냉장고에 남아있는 자궁경부암 백신 숫자를 헤아려본다. 사랑스러운 초등학교 고학년 딸아이 몫도 챙김은 물론이다.

테레사여성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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