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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 죽음 파헤치다, 네덜란드어·한자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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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지금껏 조선 영·정조대를 배경으로 한 수많은 역사물이 쏟아졌다. 그런데 그 중 하나로 파묻히기엔 아까운 역사소설 『충신』(문이당·사진)이 출간됐다. 한국인이 한국어로 쓴 작품이 아니라 더 눈길을 끈다.

지은이 마르크 함싱크(36)는 영국계 보험회사에서 일하는 벨기에인이다. 한국에서 태어나 7살 때 벨기에로 입양됐지만 한국어를 읽고 쓸 줄은 모른다. 원작은 네덜란드어 원문에 한문, 그리스어 등 온갖 나라 언어를 섞어 써내려 간 육필 원고다. 그러나 한국어로 번역되어 나온 작품은 외국어로 쓰였으리라곤 믿기지 않는다.

가령 “지아비나 부모가 죽으면 ‘아이고’, 형제가 북망산천을 넘으면 ‘어이고’, 조부모가 세상을 버리면 ‘어이, 어이’라”며 곡소리의 다름을 나타낸다거나, “약방에는 약방기생, 침방에는 상방기생, 은근슬쩍 정을 준다고 은근짜, 몸 가는 대로 마구 굴러가니 들병이일세”란 대사로 기생의 종류를 능수능란하게 나열한다. 번역자가 고생깨나 했으리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기가 막힐 노릇이다.

소설을 끝까지 밀고 가는 이야기의 힘 역시 만만치 않다. 소설은 사도세자의 병증이 깊어진 걸 염려하던 영조대 삼정승(영의정 이천보, 좌의정 이후, 우의정 민백상)의 비밀 회동으로 시작한다. 이들의 대화를 엿들은 이천보의 양아들 문원이 친구들과 함께 병의 단서를 찾아 나서는 것이 이야기의 큰 줄기다.

네덜란드어와 한자를 섞어 쓴 충신 육필 원고. “기생의 이름에 왜 매화나무 ‘매(梅)’자가 많이 들어가는가?” 등의 문장이 보인다. 지은이는 고객의 재산과 비밀을 관리하는 직업 특성 때문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문이당 제공]

세자의 병에 대한 유일한 단서를 갖고 있던 어의 장의삼이 누군가의 손에 살해돼 답을 찾을 길이 없는 가운데 이들은 음모의 한가운데로 점차 빠져들게 된다.

저자는 중국 하얼빈대학에서 중의학을 수학했다. 그는 『동의보감』 『한약집성방』까지 독파해 동양의학의 관점에서 사도세자의 광증을 해석했다. 사도세자는 피부병과 정신병을 동시에 앓았다. 두 가지 증상을 모두 나타내는 병으로는 나병과 매독이 있다. 저자는 의사들에게 자문을 구해 둘 중 매독을 채택했다.

“나질이 겉으로 곪아 든다면 양매창은 뼛속을 흐물거리게 만든다. 어차피 병이 진행되면 물렁뼈가 썩어 나질과 다를 바 없다.”(246쪽) 소설에선 화완옹주가 자신의 처소로 오라비 사도세자와 여승 가선, 기생 홍매를 끌어들여 고약한 병을 앓게 만들었다고 설정했다. 화완의 처소에서 벌어진 엽기적 섹스행각이 왕족의 근친상간이라는 추문을 낳을까 염려한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뒀다는 것이다.

저자가 사도세자의 죽음을 파고든 것은 고서적상이 보험 평가를 의뢰한 이천보의 문집 『진암집』 때문이다. 이천보의 삶을 조사하던 저자는 정사인 실록에는 그가 67세에 병사했다고 나오지만, 그 외의 기록엔 모조리 자살했다고 되어있는 것에 의문을 가졌던 게다. 그리고 중국 고전이나 시를 인용하며 같은 이야기를 반복한 『진암집』이 실은 왕실의 비밀을 기록한 것임을 알아냈단다. 이천보를 비롯한 영조대 삼정승은 그 비밀을 지키기 위해 잇달아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은이는 “이 소설은 충성심과 명예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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