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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노미네이션 거론할 때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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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번주 초 몇몇 국회의원이 갑자기 디노미네이션(denomination)이란 화폐개혁안을 들고 나와 한바탕 혼란이 있었다. 열린우리당이 공식적으로 추진의사가 없음을 밝힘으로써 논의는 일단 수면 아래로 사라졌지만, 이는 언제든 다시 제기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디노미네이션(엄밀히 말하면 리디노미네이션)은 우리 원화의 화폐단위를 100분의 1이나 1000분의 1로 낮추자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상품 가격도 그만큼 준 것으로 나타나 거래도 편해지고 숫자를 덜 써도 돼 회계처리 비용이 줄게 된다. 또한 달러 등 주요 통화와의 환율도 한 자리로 표시될 수 있어 원화의 국제적 위상도 제고된다고 한다.

그러나 디노미네이션은 공짜가 아니다. 당장 새로운 화폐를 발행하고 각종 회계 프로그램과 지급.결제 시스템을 바꾸는 데 드는 비용도 상당하다. 또한 지금과 같이 불안정한 상황에서는 정부가 아무리 순수한 의도를 가지고 화폐개혁을 단행한다고 해도 국민의 심리적 불안감이 가중될 수 있다.

실물 부문을 보면 화폐단위를 바꾼다고 동해에서 석유가 쏟아져 나오는 것도 아니라 달라질 게 없다. 즉 화폐 단위는 국민총생산과 같은 실물 부문에는 아무런 영향을 못 미친다. 소위 고전학파 경제학에서 말하는 화폐의 중립성이다. 우리나라에서 마지막으로 디노미네이션이 단행된 것은 1962년 화폐개혁 때다. 당시 화폐 단위를 환에서 원으로 바꾸면서 10분의 1로 줄였다. 그때 미 달러 환율은 1달러에 125원이었다. 현재 환율이 10배나 높으니 그동안 원화 가치는 10분의 1로 떨어진 셈이다. 그러나 같은 기간 일본 엔화는 미국 달러에 비해 두배 이상 가치가 상승했다. 이에 따라 당시 엔화보다 비쌌던 원화 가치는 현재 엔화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친다. 그동안 우리가 성장일변도 정책으로 인해 화폐 가치의 안정을 등한시한 결과다.

현재 우리 경제의 걱정거리 중 하나는 4%를 웃도는 물가상승률이다. 고유가로 어느 정도의 상승은 불가피하나 미국.일본 등 선진국에 비해 상승폭이 두배 이상 크다. 거기다 경기회복을 위해 금리 인하나 감세정책과 같은 단기 팽창정책을 동원하고 있다. 정부에서는 4% 정도는 안정적이라며 물가를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하면 물가가 안정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고 팽창정책을 계속하게 돼 우리 경제는 훨씬 혼란에 빠질 수 있다. 현재 원화가치가, 내년 1월부터 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하는 터키와 같이 커피 한잔에 100만리라가 될 정도는 아니다. 물론 경제 규모가 급속도로 커지는 만큼 준비는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 이를 공론화하고 적극 검토하는 것은 시기상조다. 우리의 성장동력을 키워 국가경쟁력이 커지면 자연히 원화가 강세가 되고 디노미네이션의 필요성도 그만큼 줄게 될 것이다.

그러나 고액권 발행은 다르다. 1973년 만원권이 발행된 이후 우리 경제의 명목 규모는 100배 이상 커졌다. 따라서 만원권만으로 거래하기에는 불편이 따른다. 신용카드의 사용으로 불편이 상당부분 해소됐지만 현금거래가 필요한 부분에서는 10만원짜리 자기앞수표가 현금을 대신하고 있다. 그러나 수백번 유통되는 한국은행권과 달리 자기앞수표는 한두 번 사용하면 환수.폐기되기 때문에 거래 비용이 크다. 이 비용만도 연간 1조원에 이른다고 한다.

일부에서는 인플레이션 심화나 뇌물 등을 우려해 고액권 발행을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은 통화금융정책 등에 영향을 받지 고액권이 야기한다는 증거는 없다. 1973년 만원권 발행 이후 물가상승률이 높아졌던 것은 마침 이때 발생한 1차 오일쇼크 때문이지 고액권 발행 때문은 아니다. 또한 그동안의 부패청산과 정치개혁으로 고액권 발행으로 인한 검은 돈거래가 늘어날 우려는 작아졌다. 따라서 고액권 발행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홍기택 중앙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