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 이창호-조선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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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강수연발의 조 9단 끝내 매복에 걸려

제5보 (68~87)〓유능제강(柔能制剛). 부드러움은 능히 강함을 제압한다는 이 말은 다른 곳은 몰라도 바둑판 위에서만은 진리 중의 진리다.

지금 판 위엔 趙9단의 흑□ 두점이 날카롭게 솟아 있다. 양분된 백은 일견 몹시 궁한 형세. 그러나 李9단은 68로 젖힌 다음 70으로 다시 젖히는 아주 부드러운 한수로 흑의 공격을 무산시켜버렸다.

비겁하게 꼬리를 내리는 수 같아서 프로일수록 쉽게 생각하기 힘든 수순이었다. 71은 이 한수인데 72, 74로 조여붙이고 76의 큰 곳으로 달려가버리니 이게 무엇인가. 흑은 허공을 향해 크게 칼을 휘두른 격이 됐다.

趙9단은 망연자실한 모습이 됐다. 공격의 목표였던 우변 백은 선수로 살아버렸다. 백▲ 석점은 거의 잡았지만 쓸모없는 돌이고 76이 워낙 큰 곳이어서 남는 게 없다. 趙9단은 끝장을 낼 결심으로 밀어붙이다가 매복에 걸려들고 말았으니 이제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큰 충격을 받았다. 너무 엉망으로 당해 끝났구나 생각했다. " (조선진9단)

사실은 아직도 흑이 나쁘지 않았으나 문제는 趙9단의 마음이었다. 그는 후회와 자책으로 달아올라 있었고 그 와중에 77이란 턱없는 수를 두고 만다.

'참고도' 흑1로 치중해 5까지 선수로 조여붙일 수 있는 곳을 77에 두어 그냥 잡히고 말았으니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국면은 아직도 긴 승부였으나 여기서 趙9단의 마음은 완전히 허물어지고 말았다.

박치문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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