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현장] 의약품 수퍼 판매, 공청회도 못 여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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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1997년 봄 재정경제원(지금의 기획재정부)이 약값 자유화를 추진한 적이 있었다. 제약회사가 약값을 정해온 제도를 개선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시장에서 경쟁이 붙으면서 약값이 떨어질 것으로 재경원은 기대했다. 약값이 싸진다니 국민 입장에선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보건복지부가 반대했다. 당시 복지부 국장은 기자에게 “약값이 싸지면 약을 오남용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이에 기자가 “1000원짜리 두통약이 500원으로 떨어지면, 한 알만 먹어도 되는 것을 ‘싼 맛에’ 두 알 먹는다는 얘기냐”고 반문한 기억이 있다. 아마 그 국장은 국민의 건강을 지나치게 걱정했든지, 아니면 ‘국민 건강’을 내세워 해당 업계의 밥그릇을 지킨 것이다.

비슷한 사안이 소화제·진통제 등 일반의약품(OTC, 의사 처방전이 필요 없는 약)을 약국 외에 수퍼·편의점 등에서 팔도록 허용하는 문제다. 경제부처를 중심으로 93년부터 추진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한밤중이나 공휴일에 문을 연 약국을 찾아 헤매는 불편을 덜 수 있기 때문이다. 약 파는 곳이 늘면 자연히 약값이 떨어져 의료비 부담을 더는 효과도 기대했다. 그러나 복지부와 약사들의 반대로 여태껏 진전이 없다.

지난 12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서울 양재동 교육문화회관에서 관련 공청회를 열 예정이었다. 하지만 100여 명의 의약계 관계자들이 공청회장을 점거하는 바람에 행사가 무산됐다. 삭발식과 침묵시위가 있었고, ‘국민건강 역행’ 등이 쓰인 피켓이 등장했다. 이들이 반대하는 주된 논리는 “수퍼 등에서 약을 팔면 오남용이 우려된다”는 것. 다시 ‘국민 건강’이 볼모로 잡힌 것이다.

미국은 수퍼에 가면 약 코너가 있다. 심지어 주유소에서도 간단한 약을 판다. 이렇게 파는 약이 10만 종을 넘는다. 이들 품목은 전문지식 없이 복용해도 몸에 무리가 안 갈 정도로 안전하다는 판단이 내려진 것이다. 영국·독일·홍콩도 사정이 비슷하다. 보수적이라는 일본도 소매점에서 취급하는 약의 범위를 확대하는 추세다.

선진국처럼 우리도 불편을 덜면서 건강도 해치지 않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일반의약품 가운데 수퍼에서 팔아도 무방한 약과 약국에서만 취급하는 게 나은 약을 재분류하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다. 더 근본적으로는, ‘수퍼에서 약을 팔 경우 함부로 약을 먹어 건강을 해칠 것’이라는 약사들의 주장이 맞는 건지도 제대로 따져봐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문제를 논의해 보자는 공청회도 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고현곤 경제정책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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