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영어 공용어화보다 급한 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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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서울 지하철 화장실에 영어 안내판이 나붙었다. 남자화장실엔 'MAN' , 여자화장실엔 'WOMEN' 이라고 크게 써붙여 놓았다.

남자는 단수, 여자는 복수로 해놓았다. 한국의 영어실력을 보여주는 것 같아 보기가 민망했다.

어떤 영자신문에는 흔히 잘 틀리는 영어 표현들을 지적하는 칼럼이 있었는데, 교통경찰에게 "이번 한번만 봐달라" 고 하는 말은 'Will you ignore this time□' ( '이번은 무시하시오' 정도의 무례한 말)이라고 해야 한다고 당당히(□)가르치고 있었다( 'Could you make an exception, please□' 라고 하는 게 좋다).

동양권에서 가장 영어를 못한다는 일본에서 영어를 제2의 공용어로 만들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보도가 나가자 한 일간지는 사설을 통해서 한국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김대중 대통령도 신년회견에서 영어의 제2공용어화를 신중히 검토해보겠다고 말했다.

21세기는 인터넷시대이고 인터넷 언어가 영어이므로 영어를 못하면 치열한 국제경쟁에서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영어의 공용어화 같은 거창한 일을 하기 앞서 먼저 해야 할 일이 많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첫째, 앞서 지적한 화장실 표시같이 어색하거나 잘못된 영어 안내판, 도로표지판 등을 좀 제대로 만들어 붙이자는 것이다.

서울지하철역에 '지축' 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것을 'Chich' uk' 이라고 적어 놓았다. 이것을 미국인이나 영국인에게 읽어보라고 하면 십중팔구는 '차이척' 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Jeechook' 이라고 쓰면 그들은 '지축' 에 가깝게 발음할 것이다. 'ㅈ' 을 ch, 'ㅊ' 을 ch' 로 표기하고, '오' 는 O, '어' 는 □로 표기하는 것은 매큔-라이샤워 방식인데, 이것은 한국학 전공의 일부 학자들이나 아는 표기법이므로 지하철안내판 같은데 사용하면 안된다.

도로표지판을 보니 'Yangch' on-Gu Off.' 와 'Hangang Br.' 라는 게 있다. 양천구청과 한강교의 영문표기인 모양인데, 옆에 충분히 공간이 있는데도 Office를 Off.로, Bridge를 Br.라고 줄여 써서 외국인들이 그 뜻을 잘 알아볼 수 없게 만들어 놓았다.

어찌 이뿐이랴. 수출용 인삼의 효능 안내서를 보니 '피로회복' 을 'restoration of fatigue' 라 적어놓았다. 이것은 사라진 피로를 도로 가져오는 것, 즉 피로회복의 정반대 뜻이다.

외국인이 가장 많이 드나드는 출입국관리소에서 나눠주는 어떤 안내쪽지에도 틀렸거나 서투른 영문이 보여서 안타까웠다.

이런 것들은 모두 한국인의 영어 실력을 외국인들에게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므로, 이러한 공적인 영어를 팻말로 써붙이거나 안내문으로 인쇄하기 전에 반드시 native English-speaker(영어원어민)에게 교열을 받도록 하는 제도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문화관광부에서 이 일을 맡으면 좋을 것이다).

둘째, 한국에서만 통하는 소위 Konglish를 버려야 한다. 예컨대 '파이팅' 은 'Way to go!' 로, '원샷' 은 'Chug!' 으로, '애프터서비스 (AS)' 는 'warranty service' 로, '핸들' 은 'steering wheel' 로 제대로 쓰도록 해야 한다.

셋째, 영어를 한글로 표기할 때는 가능한한 원어발음에 가깝게 써주도록 한다. F와 V 발음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영어발음을 표기할 수 있는 우수한 문자 한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써어비스를 '서비스' , 쎈터를 '센터' , 바압 도올(정치인 이름)을 '보브 돌' 이나 '봅 돌' 이라고 표기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된소리와 장모음 표기를 금지한 현행 외래어 표기법은 없어져야 한다.

넷째, 컴퓨터 용어를 한글로만 쓰지말고 영어와 같이 쓰도록 한다. 예컨대 '수정된 내용을 저장할까요?' 라고만 쓰지말고 영어 PC용어인 'Save changes?' 도 같이 써주는 게 좋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한글 PC 용어에만 익숙한 한국 회사원이 미국 출장을 가서 거래처의 PC를 사용하기가 어렵게 된다.

이런 기초적인 것들부터 먼저 해결하고 나서 영어의 제2공용어화를 논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조화유<재미 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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