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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39> 니에얼과 왕런메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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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에얼의 고향 윈난(雲南)성 위시(玉溪)에 서 있는 니에얼 동상

1931년 9월 18일 일본 관동군은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장제스는 전면전을 피했다. 동북을 송두리째 일본군에 내줬다. 항일 분위기가 팽배했다. 정부를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발생했다. 이듬해 1월 일본군은 상하이를 공격했다.

상하이사변은 왕런메이의 결혼과 함께 니에얼에게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2월 7일의 일기를 보면 “몇 년 혹은 몇십 년 후에 일류 연주가가 된다 치더라도 전쟁으로 고통받는 민중들의 정서를 어루만져 줄 수 있을지 의문이다. 혁명음악을 하고 싶지만 어떻게 하는 건지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다. 온종일 그 생각만 했다”는 구절이 있다. 고향의 모친에게도 비슷한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4월 21일 좌익희극가연맹의 책임자 톈한(田漢)을 만나 공원을 산책했다. 그날 밤 일기에 “총소리가 콩 볶듯 해도 꽃은 피어 있었다. 평소보다 더 아름다웠다”는 글을 남겼다.

니에는 극단들의 행태를 비판하는 글을 신문에 발표했다. “민족의 존망이 걸려있는 때에 육감적인 것 외에는 관심이 없다. 퇴폐를 예술이라 착각하고, 관객들의 눈이나 즐겁게 해주기 위해 기를 쓰며, 시민들의 저급한 취미를 조장한다”는 내용이었다. 명월가극단은 니에를 파면시켰다. 신문에 “이후에 발생하는 말과 행동은 본사와 무관하다”는 광고까지 실었다. 니에는 상하이를 떠났다.

베이핑에 도착한 니에얼은 윈난(雲南) 회관에 거처를 정했다. 말로만 듣던 고궁, 중산공원, 중남해, 향산 등 명승고적을 구경 다니느라 분주했다. 민간예술가들의 공연을 보며 넋을 잃었다. 상하이의 밤무대에서 보던 가무는 인간 쓰레기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왕런메이와 진옌(金焰:한국 이름 김덕린)의 결혼생활은 순조롭지 못했다. 두 번째 남편인 대(大)화가 예첸위(葉淺予)와도 30년을 함께 살았지만 풍파가 없는 날이 거의 없었다. 결국은 이혼하고 말년을 혼자 보냈다. 니에얼 사망 52년 후인 1987년 4월 베이징에서 세상을 떠났다. 전국정협위원 시절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오른쪽)와 함께한 왕런메이(가운데). 왼쪽은 예첸위.

제대로 된 음악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는 니에는 베이핑대학 예술학원에 지원했지만 구술시험에서 면접관의 비위를 상하게 하는 바람에 낙방했다. 하는 수 없이 푼돈을 모아 러시아인에게 개인 레슨을 청했다. 어찌나 비쌌던지 4일밖에 받지 못했다. 난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받은 음악교육이었다. 동북항일 의용군에게 보낼 기금을 모으고 항일을 소재로 한 연극과 음악회를 열었다. 좌익음악가연맹에도 가입했다. 틈만 나면 왕런메이에게 편지를 보냈다. 답장을 받으면 싱글벙글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니에는 살 길이 막막했다. 무일푼인 주제에 베이핑에서 겨울을 나려 하다가는 얼어죽을지도 몰랐다. 다시 상하이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베이핑을 떠나는 날 동향 친구들이 창작을 권했다.

상하이에 돌아온 니에얼은 깜짝 놀랐다. 중국공산당 상하이 중앙국이 혁명문예의 전파와 영향력을 확대시키기 위해 영화계를 거의 장악하고 있었다. 니에는 영화음악에 전념했다. 1933년 봄 톈한은 니에를 붉은 대문 안으로 인도했다. 후일의 문화부 부부장 샤옌(夏衍) 앞에서 입당 선서를 했다. 마르크스의 평전을 다시 읽었는지 “이전에 마르크스의 저작을 읽었을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고 일기에 썼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신문 파는 소녀에게 신문팔이의 노래(賣報歌)를 선사해 동지들을 기쁘게 했다.

35년 1월, 동북의 항일전선에 뛰어든 여학생들을 소재로 한 ‘풍운아녀(風雲兒女)’의 촬영이 시작됐다. 감독은 샤옌, 왕런메이가 주연을 따냈다. 소문을 들은 니에는 샤옌을 찾아가 주제가 작곡을 자청했다. 자신이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왕런메이가 노래를 부르게 해달라는 요구도 샤옌은 수락했다. 감옥에 있던 작사자 톈한도 동의했다. 니에는 이틀 만에 ‘의용군행진곡(義勇軍進行曲)’의 초고를 완성했다. 영화가 상영되자 동북의 항일의용군은 온종일 이 노래만 불러댔다. 마치 자신들을 위해 만든 노래 같았다.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4월 15일 니에얼은 소련 유학을 위해 상하이를 떠났다. 3일 만에 도쿄에 도착했다. 7월 17일 오후 사가미 해안에서 익사하는 날까지 음악회와 영화관을 신나게 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니에얼의 마지막 친구는 두 명의 한국인이었다. 35년 7월 7일의 일기를 보면 저명한 일본 사진가의 문하생인 이상남(李相南)이라는 한국인이 등장한다. 다음 날 일기에는 극작가 어우양위칭이 한국인 희극비평가라며 임화(林和)를 소개했다는 내용이 있다. 시인 임화와 동일 인물인지는 확실치 않다. 세 사람은 니에가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10일간 도쿄 바닥과 교외를 오가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함께 한국여행 계획을 짜기도 했다. 이 외로운 천재음악가는 자신의 노래가 국가로 선정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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