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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ose-up] 실러 예일대 교수가 말하는 세계 경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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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로버트 실러 예일대 경제학과 교수. [블룸버그]

세계적인 석학도 경기 전망을 내놓기를 주저했다. 로버트 실러 예일대 경제학과 교수는 ‘경기 회복세가 어떤 모양이 될 것 같나’라는 질문에 “실망스러운 수준으로 경기가 회복할 것이 예상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판단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2000년 미국 닷컴 버블의 붕괴를 예측하고, 금융위기 이전부터 집값 거품을 경고한 그다.

각종 세미나와 연구로 잠깐 짬을 내기도 힘든 그와 10일 전화로 단독 인터뷰를 했다. 그는 미국 뉴헤이븐의 예일대 연구실에서 전화를 받았다.

그는 “상호 충돌하는 신호들이 동시에 나오고 있어 경기 예측이 혼란스럽다”면서도 “세계 경제가 1990년대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처럼 장기 침체에 빠질 수도 있다”는 전망을 내놓았다. 굳이 알파벳으로 표현하면 경기 전체는 ‘L’자 형에, 주택 시장은 ‘W’자 형에 가깝다고 봤다. 따라서 그는 “아직 출구전략을 고려하기 이르다”며 “미국은 내년 말 또는 2011년까지도 금리를 인상하지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금융위기의 원인은.

“지금은 대공황 이후 최악의 금융 불황이다. 집값과 유가의 거품은 ‘투기적 열망(speculative enthusiasm)’ 때문에 생겼다. 인간의 심리이기도 하다. 느슨한 규정 탓도 있다. 통화정책은 거품을 키웠다. 시장에 대한 과도한 믿음도 작용했다. ‘시장은 효율적이다’라는 가설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강하게 박혀 있다. 시장에 대해 보다 합리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

-심리가 문제라는 얘기인가.

“인간 심리가 경제의 동력이다. 인간의 생각이 경제를 지배하고, 야성적 충동이 경제를 이끈다. 그런데 관리가 어렵다. 경제위기를 관리하는 것은 사람의 공포와 신뢰 상실을 관리하는 것이다. (지난해 위기 발생 때보다) 시장 상황은 나아져 보이는데, 진정한 신뢰가 돌아온 게 아니라 정부의 경기 부양에 힘입은 바 크다.”

-앞으로 전망은.

“기업 활동이 살아나야 경제가 성장하는데, 현재 상황에서 기업인들이 사업 확대와 신규 사업 진출과 같은 본래의 기능을 제대로 하기 어렵다. 그래서 회복을 하더라도 매우 긴 침체기를 거쳐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V, W, U, L 중 어떤 형태가 될까.

“딱히 말하기 어렵다. 다소 실망스러운 수준의 경기 회복 정도로 해두자.”

-더블딥(이중 침체)을 의미하나.

“W자 형 경기 흐름은 80년대 초반 미국 등 몇몇 나라에서 나타난 게 유일하다. 과거에 비춰보면 W자 형은 없을 것 같다. 글쎄… 음, 아마도 L자가 가장 그럴듯하다. ‘느린 회복(weak recovery)’이란 표현이 적당하다. 90년대 일본과 같은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일본식 ‘잃어버린 10년’을 세계가 함께 겪는다는 얘긴가.

“중국이나 인도는 확실히 더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선진국들은 경제 성장이 완만할 수밖에 없다.”

-위기의 근원이 됐던 미국 주택시장 전망은.

“S&P 케이스-실러 지수에 따르면 샌프란시스코 같은 도시에서는 집값이 12%나 뛰었다. 겨우 4개월 동안 말이다. 영국이나 홍콩 등 여러 나라에서도 주택 가격이 오르고 있다. 주택시장만 한정해서 본다면 W 모양이 나올 수도 있겠다. 병든 경제(sick economy)라는 점을 되새기면 곧 (상승세가) 끝날 날이 올 수 있다. 그러나 미래는 모른다. 대공황 때인 1933~37년 증시 붐이 있었고, 집값도 올랐다.”

-집에 대한 투자는 위험한가.

“집값은 항상 오른다는 맹목적인 믿음이 위험하다.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면 집값은 오르는 게 아니다. 기술 발전으로 건설사들은 집을 더 싸게 짓는다. 기존 주택 값이 내릴 수밖에 없다. 집을 ‘보장된 투자’라고 생각하는 것, 그게 바로 버블을 만든다.”

-금융위기 재발 방지책은.

“‘금융 민주화(democratization of finance)’가 필요하다. 금융 상품도 인간을 위해 디자인돼야 하고, 금융 기술 발전의 혜택을 더욱 많은 사람이 받아야 한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소비자들을 돕기보다는 단순히 모기지를 팔아먹으려는 데서 비롯했다. 금융사들이 상품을 마구잡이로 만들고, 권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소비자가 금융 자문을 받도록 정부가 보조하는 방법도 필요하다.”

-금융 자문이란 무슨 의미인가.

“소비자들은 복잡한 금융 상품을 분석할 능력이 없다. 그래서 금융에도 의사 같은 존재가 필요하다. 건강검진을 받듯이 국민 모두가 상품 판매와 완전 무관한, 상담만으로 대가를 받는 상담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특정 상품을 파는 대가로 받는 수수료를 받지 않는 독립적인 상담사여야 한다.”

-아시아 시장은 어떻게 보는가.

“한국 전문가는 아니지만 일반적인 관점에서 볼 때 한국의 수출이 타격을 받을 것이다. 내가 한국 투자자라면 집에 너무 많이 투자하진 않겠다. 주식·채권·주택 등에 분산 투자하고, 지역적으로도 한국과 한국 이외의 곳에 나누는 게 좋겠다. 중국 시장은 너무 휘발성이 강해 예측이 어렵다.”

-한국이 금융 중심지가 될 수 있다고 보는가.

“홍콩이나 싱가포르와 경쟁하는 것일 텐데, 꽤 쟁쟁한 경쟁자들이다. 정부가 정책을 제대로 잡아야 한다. 런던이 40년 전에 잃었던 금융센터 지위를 되찾은 점을 참고해 볼 만하다. 온전하고 견고한 금융 비즈니스를 격려하고 시장을 신뢰할 수 있도록 규율을 제대로 잡는 것이다. 시간이 10년 정도 지나면 한국도 가능할 것이다.”

박현영 기자

로버트 실러는 닷컴·부동산 거품 붕괴 예측한 비관론자

로버트 실러 교수는 두 번의 대형 ‘거품 붕괴’를 예측해 유명세를 탔다. 2000년 3월 미국 나스닥지수가 사상 최고치를 기록할 때 출간된 저서 『비이성적 과열(Irrational Exuberance)』에서 ‘닷컴 버블’을 경고했다. 불과 한 달여 만에 시장은 급락하기 시작했고 당시 이코노미스트지는 이 책을 ‘현대판 경제학의 고전’이라 평가하기도 했다.

2005년 이후에는 각종 토론회 등을 통해 부동산 거품의 붕괴 가능성을 지적해왔다. 이 때문에 월가에서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 스티븐 로치 모건스탠리 아시아 회장과 더불어 ‘비관론자 3인방’으로 불리기도 한다. 행태금융학에서 부동산, 위험관리 등의 다양한 주제를 넘나들며 왕성한 저작 활동도 벌이고 있다.

그는 저서를 통해 ‘합리적 시장’이라는 개념에 반기를 들어왔다. 그는 경제를 움직이는 건 확률 등 합리적인 근거보다는 오히려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s)’에 가깝다고 말한다. 이 충동은 기업가 정신으로 이어지면 경제에 활력을 준다. 하지만 자신감이 지나칠 때는 주식이나 부동산 시장이 비이성적인 과열로, 지나치게 부족할 때는 대공황과 같은 침체를 낳는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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