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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홍위병을 돌아보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지도자가 기존의 정치체제 안에서 충분한 권력기반을 확보하지 못하면 외부의 힘에 유혹을 느끼게 된다.

60년대 중국 대륙을 폭력과 유혈(流血)로 휩쓴 홍위병(紅衛兵)은 공산당 지도부 장악에 자신이 없어진 마오쩌둥(毛澤東)이 체제 밖의 힘을 끌어들여 자신의 권력을 유지 내지 강화하려고 조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홍위병이 주도한 문화혁명(文化革命)에 대한 평가도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으나 일반적인 견해는 있다.

그 운동이 중국 사회를 분열시켜 수백만의 인명이 살상됐으며, 지식인 탄압으로 중국 문화를 수십년 후퇴시켰다는 비난이다.

毛를 사랑하는 대부분의 중국 사람들도 그의 유일하고 중대한 실책으로 흔히 문화혁명을 든다.

그런 부정적인 평가가 아니더라도 총선시민연대와 그들이 호소하는 선거혁명을 두고 홍위병과 문화혁명을 떠올리는 것은 온당치 못한 일이 될는지 모른다.

우선 홍위병은 위로부터 시작된 조직이었지만 총선연대는 아래로부터 시작된 조직이며, 문화혁명은 피를 동반한 관제(官製)운동이었지만 선거혁명은 무혈(無血)의 시민운동이기 때문이다.

또 끊임없이 나도는 음모설(陰謀說)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는 정부나 여당이 총선연대의 조직과 활동에 개입했다는 뚜렷한 증거는 나오지 않았을 뿐더러 시민단체의 선의(善意)를 의심할 근거도 없다.

그들이 내건 대의(大義)는 누구도 대놓고 부정하기 어렵고, 많은 사람들은 그런 그들의 활동을 오히려 필요하고도 시의적절한 것으로 본다.

그런데도 총선연대 시민단체의 활동을 보면 자꾸 홍위병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들의 활동이 이제 시작이며, 정말로 중요한 전개와 변화는 앞날에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민련과 공조가 깨지면 집권여당은 불가피하게 체제 밖에서 힘을 끌어들여야만 한다.

그런데 이미 절로 만들어진 조직이 있으니 그 조직을 활용하고 싶은 유혹을 억제하기 어려울 것이다.

시민단체 쪽도 그렇다.

출발의 선의와 무사(無私)를 믿는다 쳐도 그 일관된 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쌀에는 뉘가 섞여들게 마련이다.

더구나 대중운동의 장(場)은 시장 못지 않게 그레셤의 법칙이 자주 적용되는 곳이다.

거기에다 기준의 설정과 적용에 요구되는 공정성을 확보하는 일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벌써 일부 지방에서는 총선연대의 낙천자 명단이 오히려 그 지역에서는 당선자 명단으로 통하고 있다고 한다.

의식의 차이라고 무시하기에는 너무도 섬뜩한 현상이다.

총선연대의 공천반대 기준에는 지역감정의 조장이라는 항목이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이 경우에는 오히려 총선연대의 활동이 지역감정을 조작한 꼴이 된 셈이다.

총선연대의 기준이 너무 윤리적.감성적 측면만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선거는 유능한 정치인을 뽑는 것이지 깨끗하고 착한 시민을 상 주는 것이 아니다.

예견력.결단력.종합관리능력 따위의 너무 실제적이고 효율적인 정치생산만을 기준으로 국회의원을 뽑는 것도 문제지만, 청렴이나 의리 같은 윤리적 덕목만을 강조하는 것도 올바른 투표권 행사를 유도하는 일은 못된다.

거기에다 만약 총선연대가 출발할 때의 신선함을 유지하지 못하고, 집권여당이 그들을 활용하고 싶은 유혹을 끝내 떨쳐버리지 못한다면 총선연대는 한국판 홍위병에 지나지 않고, 그들이 외친 선거혁명은 질 낮은 문화혁명이 되고 만다.

이런 점에서 총선연대나 집권여당이 스스로를 경계해야 함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시민들도 눈을 부릅뜨고 그들 양쪽을 모두 지켜봐야 한다.

이문열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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