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못 하는 남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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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호 10면

작가 보르헤스는 갖고 있는 책의 양이 엄청났는데 책에 대한 갈망은 더 엄청났던 모양이다. 그는 이미 갖고 있는 책도 생전에 다 읽기 힘들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항상 새 책을 보면 사고 싶은 유혹에 시달렸다고 한다. 서점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발견할 때면 보르헤스는 한숨을 쉬었다. “저 책을 살 수 없어 얼마나 슬픈가? 집에는 같은 책이 이미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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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내가 놀란 것은 책에 대한 그의 애착보다 기억력이다. 그는 어떻게 그 책이 이미 집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었을까? 내 기억력은 기억‘력’이라고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허약하다. 나이가 들수록 기억은 어두워진다. 요즘은 자주 기억이 정전된다. 오히려 내가 가진 것은 기억력이 아니라 ‘망각력’인지도 모르겠다.나는 한 페이지를 읽으면 이미 읽은 두 페이지를 잊어버린다. 기억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는데 망각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가끔은 뭔가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통째로 잊어버리기 위해 독서를 하고 있다는 의심이 든다.

나는 주말에 종종 서점에 들른다. 꼭 책을 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둘러보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진다. 그것은 마치 백화점에서 아이쇼핑만 해도 즐거워지는 여자의 마음과 같을 것이다. 이번엔 또 어떤 책이 나왔는지 살펴보는 설렘도 좋고, 오래전에 나온 책들 속에서 눈이 번쩍 뜨이는 책을 발견하는 기쁨도 좋다. 무엇보다 서점에서는 책을 직접 만지는 스킨십의 쾌락이 있다. 책장을 넘겨보고 책등을 쓰다듬을 때면 기분이 야릇해진다.

얼마 전 나는 니콜러스 로일이 쓴 『How To Read 셰익스피어』를 발견했다. 서점에서 목차와 저자 서문을 훑어보고는 마음에 쏙 들었던 것이다."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극, 역사극, 그리고 비극’이라는 제목의 첫 작품집의 머리글 ‘가지각색의 독자들에게’에서 셰익스피어의 친구이자 동료 배우인 헤밍과 콘델은 간단한 조언을 건넨다. “그러니까 자꾸, 자꾸 읽으시기를.”

아마 책을 산다면 아내로부터 “또 책 샀어요?”라는 잔소리를 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책을 산다. 그러고는 해야 할 집안일은 팽개치고 소파에 앉아 아내의 잔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재미있게, 열심히 읽는다. 다 읽은 책을 책장에 꽂으려고 할 때 나는 비로소 깨닫는다. 이미 같은 책을 사서 밑줄까지 그어가며 읽었다는 사실을. 나는 한숨을 쉰다. “저 책을 샀으니 얼마나 슬픈가? 집에는 이미 같은 책이 있는 줄도 모르고.”

나는 기억 못 하는 남자다. 나 같은 독자를 두고 헤밍과 콘델은 말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자꾸, 자꾸 읽으시기를.”


부부의 일상을 소재로 『대한민국 유부남헌장』과 『남편생태보고서』책을 썼다. 결혼정보회사 듀오에서 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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