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의 정치Q] 노 대통령과 '보안법의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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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은 국가보안법과 숙명적인 인연이 있다. 보안법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대통령 노무현'은 없을 것이다.

1977년 9월 31세의 노무현은 유신정권의 판사가 됐다. 훗날 "억지 헌법 때문에 모멸감이 쌓였다"고 회고했지만 그는 별다른 저항 없이 판사를 거쳐 조세전문 변호사가 됐다. 79년 반(反)유신 투쟁인 부마항쟁 때만 해도 가투(街鬪)는 그에게 남의 일이었다. 그런 노 변호사가 보안법과 부닥친 것은 81년 여름 부림(釜林)사건 때였다. 뒤에 노 대통령의 민정비서관을 지낸 이호철씨 등 부산지역 운동권 학생.청년 20명이 북한에 동조하는 의식화 학습을 한 혐의로 구속됐다.

이 사건에서 노 변호사는 두개의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하나는 학생들이 겪었다는 처절한 고문이며 다른 하나는 보안법의 악용이라는 것이다. 훗날 그는 "탁구장.돌잔치.계곡 같은 데서 학생들이 모여 정권을 비판하거나 '전환시대의 논리' 같은 책을 읽은 정도인데 이를 엄청난 좌익사건으로 조작했다"고 기억했다.

노 대통령의 인생에 보안법이 다시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은 82년 5월의 부산 미문화원 방화였다. 몇몇 대학생이 광주항쟁 진압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묻는다며 불을 질렀다. 변호인단에 끼이면서 노 변호사는 이돈명.홍성우.조영래 등 전국적인 인권변호사와 교류하게 된다. 보안법에 대한 노 대통령의 추억은 대통령 자리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는 지금 폐기론의 기수가 돼 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이 너무 개인적인 경험에 빠져 숲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는 반론이 많다. 부림사건만 해도 다른 주장이 거세다. 한나라당 최병국 의원은 당시 부산지검 공안부 수석검사로 기소를 주도했다.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부림을 포함한 81년의 운동권 보안법 사건은 3~4년 뒤 학생운동권을 휩쓴 민중민주(PD).민족해방(NL) 등 좌파 이념의 원조였다. 그리고 당시의 보안법은 지금보다 엄격해 단순한 반국가단체 찬양.고무도 처벌됐다. 지금의 잣대로 당시의 안보상황을 재단해 '보안법 악용'이라고 하면 안 된다."

부림의 진실은 엄격한 검증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악용이었다 해도 노 대통령이 지휘하는 지금의 민주사회에선 그런 악용은 거의 불가능하다. 인권변호사 출신이 원장을 맡고 있는 국정원이나 정치적 독립을 이뤘다는 검찰이 악용할 리가 없다.

새 수도처럼 보안법 폐지에 대해 반대여론은 매우 뜨겁다. 새 수도처럼 보안법 폐지는 노 대통령이 입을 크게 델 수 있는 뜨거운 감자다.

김진 정치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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