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수류탄에서 원자로까지 (3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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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39) '옷'벗을 결심

나는 한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어차피 국방과학연구소(ADD) 인력을 절반 이상 줄여야 한다면 유능한 사람들이 남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꼭 남아야 할 인력부터 단계적으로 추려나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발언을 하면서도 내 마음은 정말 착잡했다.

함께 일한 동료와 부하 직원들을 우리 손으로 내 보내는 악역을 우리가 맡을 줄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서정욱(徐廷旭.66.과학기술부장관)ADD 소장과 핵심 간부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내 얘기를 듣고 있었다.

나는 발언을 계속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든 핵심 요원을 남도록 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만약 인원을 줄이는 문제로 계속 분위기가 뒤숭숭해지면 우수한 사람들이 먼저 떠날 겁니다. " 고육책(苦肉策)으로 내놓은 방안이었다.

그러나 나 자신도 이 일을 실천에 옮기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날 핵심 간부회의에서 여러 방안들이 제시됐다.

그러나 최종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다.

어느 방안을 택하든 후유증이 따르긴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할 수만 있다면 아무도 내보내지 않고 시간을 끄는 게 최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徐소장을 비롯, 핵심 간부들도 내심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상황은 내가 바라던 방향과는 정반대로 전개됐다.

우수 인력들이 자발적으로 속속 떠나기 시작한 것이다.

ADD 입장에서는 꼭 필요한 인력들이었다.

나를 비롯해, 간부들은 이들을 한사코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이들은 "일할 맛이 안 나 더 이상 있고 싶지도 않고 마침 갈 곳이 있다" 며 완강히 뿌리쳤다.

1980년 여름 ADD는 '떠나는 사람들' 로 내내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이런 와중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듬해 예산이 대폭 삭감됐다.

빨리 인원을 정리하라는 신호였다.

외부의 압력은 시시각각 조여왔다.

그러나 徐소장과 우리 간부진은 고민만 할 뿐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나 역시 분위기 탓인지 일이 손에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일만 열심히 하면 됐다.

그러나 정권이 교체되는 과도기라 그런지 이래저래 신경 쓰이는 데가 많았다.

게다가 대전기계창장에 임명된지 불과 3개월만인 1980년 10월 유도탄(미사일)개발단장에 새로 임명된 것도 또다른 이유였다.

대전기계창장은 유도탄.전자 등 ADD의 핵심 분야를 모두 관장했다.

그러나 유도탄개발단장은 직함 그대로 유도탄 개발만 책임졌다.

하지만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미 유도탄 개발쪽은 朴대통령 사망후 된서리를 맞았기 때문이다.

거의 예산이 배정되지 않았다.

전략무기 개발은 아예 포기하라는 대내외 압력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그러니 유도탄이 목표물을 끝까지 추적하게끔 하는 관성항법장치(INS)개발은 더 이상 진척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아군 지역에 접근한 적의 전투기나 군함 등을 격추시키는 전술유도무기 쪽으로 눈을 돌렸다.

'함대함(艦對艦)유도무기' '무(無)유도 다연장 로켓' 등을 개발하는 데에 역점을 둔 것이다.

그러나 정작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그 덕분에 모처럼 한가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진로문제를 곰곰히 생각해 봤다.

1953년 공사 입교후 군에 몸담은지 벌써 28년. 강산이 변해도 세 번은 변했을 긴 세월이 흐른 것이다.

군복을 벗어도 아무런 미련이 없을 것 같았다.

후배들에게 진급 기회를 제공하고도 싶었다.

당시 ADD내에서 육.해군 출신은 대령 진급이 잘됐지만 유독 공군만은 대부분 중령에서 예편했다.

그만큼 결원(缺員)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고심끝에 군복을 벗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 전에 해결할 일이 한가지 있었다.

나는 윤자중(尹子重.71.전 교통부장관)공군참모총장을 찾아갔다.

글= 한필순 전 원자력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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