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수류탄에서 원자로까지 (3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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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38) 인원삭감 태풍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은 국방과학연구소(ADD)에 엄청난 회오리 를 몰고왔다.

새로 집권한 신군부는 미국을 지나치게 의식, 朴대통령이 애착을 갖고 추진해 왔던 자주국방정책을 대폭 손질했다.

그동안 자주국방정책이 미국의 신경을 극도로 자극, 한.미관계를 악화시키는 주원인으로 작용했다는 판단에서였다.

이같은 신군부의 태도는 곧바로 ADD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70년대 자주국방 정책을 실천에 옮기는 데 가장 주도적 역할을 한 기관이 다름아닌 ADD였기 때문이다.

ADD의 기구축소는 불을 보듯 뻔했다.

1980년 7월 8년반 가까이 ADD를 이끌어온 심문택(沈汶澤.1998년 작고)소장이 마침내 사임했다.

그는 자주국방정책이 본격 추진된 시점에 소장으로 취임, 국산무기 개발과 인력확충 등을 통해 그같은 정책이 성공을 거두도록 ADD를 진두 지휘해 온 실무 사령탑이었다.

그의 사임은 ADD 역할이 크게 축소될 것임을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

후임 소장에는 서정욱(徐廷旭.66.과학기술부장관)박사가 취임했다.

徐소장은 20년 넘게 나와 같은 직장에서 일한 절친한 동료였다.

그는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한 후, 미 텍사스 A&M 대학에서 전기공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나처럼 공사(空士)출신은 아니었지만 공군 장교(중령 전역)로 나와 함께 공군사관학교 교관을 지내기도 했다.

또 1970년 8월 ADD 창설 멤버로 함께 발탁돼 나는 병참물자개발실장을, 그는 통신개발실장을 각각 맡았다.

질긴 인연이 공사에서 뿐 아니라 ADD까지 이어진 것이다.

그후 그는 부장-부소장을 거치면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매사 적극적이고 부지런했다.

그의 소장 취임은 이같은 요인들이 어우러진 결과였다.

그러나 시기가 문제였다.

격변기에 소장에 취임한다는 것은 본의 아니게 여러가지 악역을 맡아야 함을 뜻했다.

ADD 실장급 이상 간부들은 신임 소장에게 일괄 사표를 제출했다.

당시 간부는 70~80명이었다.

하지만 徐소장은 대부분 사표를 반려했다.

곧이어 단행된 인사에서 나는 대전기계창장에 임명됐다.

그러나 좋아할 일은 결코 아니었다.

ADD 내부 분위기가 너무 가라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인사 단행후 열린 핵심 간부회의에서 徐소장은 마침내 ADD내에 떠돌던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는 회의를 시작하자마자 "반 이상을 내 보내야 할 것 같다" 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徐소장의 얼굴에서 고뇌하는 흔적이 엿보였다.

참석자들도 몹시 침울한 표정이었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나는 '상부에서 어떤 지시를 받았구나' 하고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하는데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나 역시 심정이 착잡했다.

지금까지 함께 동고동락해 온 동료나 부하 직원들을 내 보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었다.

죄(?)라고 한다면, 상관의 지시를 받고 열심히 일한 죄 밖에 없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유능한 연구원들은 알아서 짐을 챙겼다.

이유는 간단했다.

한마디로 일할 분위기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전임 대전기계창장으로 미사일 개발 책임자였던 이경서(李景瑞.62.국제화재해상보험 고문)박사나 한홍섭(韓洪燮.59.단암전자통신 대표이사 사장)박사 등은 미련 없이 사표를 제출했다.

떠나는 사람이나 남는 사람 모두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시 ADD에는 국내외에서 유치한 과학자와 연구원 등 국내 최대 규모의 연구인력이 집결해 있었다.

이들을 반 이상 줄이라니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할 수 없이 내가 입을 열었다.

글= 한필순 전원자력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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