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이 좋아 대학로 간 동숭파출소 김원배경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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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근주자적(近朱者赤)이요,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 했던가.

연극에 대한 남다른 열정으로 연극의 거리 대학로를 지키고 있는 경찰관이 있어 화제다. 동숭파출소의 김원배 소장(52.경위)이 그 주인공.

"대학로의 주인이 누굽니까. 연극인입니다. 경찰이 주인을 섬기는 건 당연하지 않습니까. " 반문부터 예사롭지 않다.

한국배우협회 최병규 이사가 거든다. "지난해 여름 비좁은 협회 사무실에 경찰이 들어왔어요. 뭐 도울 일이 없느냐는 거에요. '이상한 경찰도 있구나' 하며 넘겨버렸죠.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1주일에 수차례 찾아오더라고요. "

김소장이 들른 곳은 배우협회만이 아니다. 지난해 7월 부임 이래 하루도 거르지 않고 관내 문화관련 단체.극단 등을 순례하고 있다. 불편한 것은 없는지, 도와줄 것은 없는지 물어본다. 때론 분장실까지 내려가 배우들과 얘기를 나눈다. 1주에 한번 정도는 공연도 관람한다.

이런 노력 탓에 그는 대학로 무대에 오르는 웬만한 연극을 꿰고 있다. 누가 공연장을 물으면 "아 그거요. ○○극장으로 가세요" 라고 안내한다. 본인뿐 아니라 부하 직원들에 대한 교육도 철저하다.

그가 특히 신경을 쓰는 대목은 공연장 주변의 소란. 대학로를 자주 찾는 청소년들이 처음엔 반항했으나 지금은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 스스로 조용해질 정도로 가까워졌다.

처음엔 반신반의하던 연극인들도 그를 신뢰하게돼 지난 연말 한국연극협회(이사장 박웅)에선 그에게 공로패를 수여하기도 했다.

"귀하는 연극예술에 대한 애정과 대학로 발전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이라는 격려문구와 함께.

뿐만 아니다. 김소장은 사재를 털어 지난해 9월부터 매달 독특한 방범소식지를 만들고 있다. 관내 치안사항과 함께 공연소식도 빠뜨리지 않고 소개한다. 소식지를 서울시내 여러 경찰서에도 돌리는 등 대학로 홍보에 적극적이다.

극단에서 얻은 공연안내 팸플릿을 파출소 안에 구비해 언제라도 민원인의 궁금증을 풀어줄 자세를 갖추고 있다.

김소장은 재미있는 계획도 세워놓았다. 날씨가 풀리는 3월께 파출소 건물의 2.3층을 연극인들에게 개방할 예정. 부하 직원들이 3교대로 근무해 현재 거의 놀고 있는 파출소 2층은 연극인의 대화방으로, 옥상 3층은 장판을 깔아 연기연습실로 활용할 생각이다.

"연극인을 옆에서 보면 정말 도와주지 않을 수가 없어요. 궁핍한 가운데서도 열심히 작품에 매달리는 모습은 정말 아름다워요. "

하지만 대학로에 대한 불만도 많다. 사정은 이해하지만 조악한 불법 홍보물이 대학로 뒷골목에 난무해 애로가 크다.

"치우면 다시 갖다놓는 숨바꼭질의 연속이지요. 그래서 한번은 차범석 전 문예진흥원장을 찾아가 대학로 공연을 좀더 산뜻한 형식으로 알릴 방법은 없느냐고 따지기도 했어요. "

김소장이 이처럼 연극을 사랑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도 한때 연극을 전공한 학생이었던 것. 중앙대 연극영화과를 67학번으로 입학, 졸업한 후 잠시 연출도 했었으나 지난 73년 가계가 어려워 경찰에 입문하게 됐다.

이후 주로 강력계 형사로 일해왔으나 지천명(知天命)의 나이 쉰을 넘기면서 젊은 시절의 꿈이었던 연극에 조금이나마 가까이 서려고 대학로 근무를 자원했다.

"퇴직 후에 여유가 생기면 서울 변두리에 3층 건물을 세울 겁니다. 1층은 커피숍으로, 2충은 연극 자료실로, 3층은 연기 연습장으로 꾸미고 싶어요. 하지만 그런 날이 올지…. " 신분은 경찰이지만 마음만은 연극계에 첫발을 내민 10대 같은 분위기가 물씬하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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