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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탐정 장비호의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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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건강은 어떠십니까?”

“견딜 만해요. 밤마다 이 궁리 저 궁리 잠이 안 와. 지난날이 후회만 되고 마음이 괴로워….”

“선생님은 온 재산 열정 바쳐 춘원과 함께 ‘조선문단’을 창간, 한국 문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셨죠. 그 공적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30, 40, 50년대 이 나라 방방곡곡 선생님의 작품을 읽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춘해 선생님, 이제 필생의 대작을 쓰셔야 할 때가 아닙니까.”

“마음은 그런데, 쓰다 지우고 쓰다 지우고 뭐 그래요. 도통 붓이 나가지를 않아. 눈뜨면 생활에 쪼들려 하루가 막막하고, 친구들은 모두 먼저들 가버렸지. 월탄하구 나만 남았어.”

자괴의 말 끝에 춘해는 눈시울을 붉힌다. 전매청 옆 성당에서 아련하게 울려오는 저녁 종소리를 남기며 버스는 그를 싣고 창경원 쪽 눈발 속으로 멀어져 갔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해 1974년 겨울 저녁이었다.

춘해는 1932년 동아일보·조선일보에 ‘마도의 향불’ ‘방랑의 가인’ 등을 연재, 전국적 대호평을 받는다. 춘향전·장한몽 등 딱지본만 읽어 온 독자들에게 현대소설 베스트셀러 작가가 탄생한 것이다. 그때까지 독서 습관이 없던 대중에게 독서의 즐거움을 알게 해줘 국민의 지적 수준 향상에 큰 역할을 한다. 1948년, 당장 살길이 막막한 춘해는 이북(李北) 옛 중앙일보 사장을 찾아간다.

“여보, 잘 팔릴 탐정소설이나 하나 써 보구려.”

썩 내키진 않았지만, 춘해는 원고료가 필요했다. 그는 영국의 코넌 도일, 프랑스의 르블랑, 일본의 에도가와 란포 등의 탐정소설들을 재미있게 읽은 기억을 더듬으며 플롯을 구상했다. 호구지책으로 열어 놓은 구멍가게 뒷방에서 개다리밥상을 놓고 공책에다 연필로 첫 탐정소설을 써 나갔다. 이렇게 해서 한국의 홈즈와 루팡이라 할 명탐정 장비호를 탄생시킨다. 춘해의 한국판 탐정소설 ‘국보와 괴적(怪賊)’을 처음 접한 독자들은 열광했다. 6·25 전란이 일어나자 인민군에게 끌려가 문초를 받는다. “동무가 그 유명한 소설쟁이 방인근이오? 탐정소설 ‘국보와 괴적’ 말이야. 국보는 국방군이고 괴적은 인민군이란 말이지?” 춘해는 며칠간 곤욕을 치르며 잡혀 있다가 자술서 몇 십 장 쓰고 가까스로 풀려난다.

그 시절, ‘장비호 탐정’ 하면 방인근이요, ‘유불란 탐정’ 하면 김내성이었다. 그는 잇따라 걸작 탐정소설 ‘대도와 보물’ ‘방화살인사건’을 써서 생계를 꾸려 나갔다. 그때 12살짜리 나 또한 장비호 탐정에 밤새워 열광하는 애독자였다. 춘해는 초등학생에서 대학생, 일반인, 가정주부들까지 애독한 그야말로 국민적 작가였다. 일본 주오대학 독문과 출신의 한국 신문학 개척자 춘해 방인근. 그러나 오늘날 그를 아는 이 찾기 어려우니 인생의 무상함이런가.

고정일 소설가·동서문화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