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비서관 "행사비 대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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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정철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右)이 7일 춘추관 기자실에서 기업에 디지털방송 선포식 행사비 분담금을 요청한 사실에 대해 해명하고 있다. 최정동 기자

청와대 비서관이 대기업체 임원에게 대통령 행사의 비용 분담을 요청한 사실이 드러났다. 청와대 양정철 홍보기획 비서관은 "지난달 말 삼성 L부사장에게 전화로 노무현 대통령이 참석할 '디지털 방송 선포식'(지난 3일 개최)의 행사 분담금을 내줄 수 있는지 문의한 적이 있다"고 7일 오후 밝혔다. 노 대통령은 이날 양 비서관에게서 이 같은 보고를 받고 "기업에 오해 살 만한 전화를 했다는 점에서 적절치 못한 일처리였다"고 질책했다고 양 비서관 본인이 전했다.

'디지털 방송 선포식'은 디지털 방송의 시작을 알리기 위해 계획된 행사로 방송위와 방송협회.방송사, 산자부.정통부.문화부 등이 공동주최했고 가전 회사 3곳(삼성전자.LG전자.이레전자)이 디지털 TV 제조업체로 행사장 내 부스를 운용하는 형태로 참가했다. 전체 행사 비용은 8억원 정도로 알려졌다.

양 비서관은 이날 "행사가 임박한 시점에서 참여기업들이 분담금을 내려 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듣고 행사를 담당하는 주무 비서관으로 차질을 우려해 점검차 전화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화 통화는 양 비서관이 먼저 전화를 걸어 메모를 남긴 다음날 이 기업의 임원이 답신을 해 이뤄졌다.

양 비서관은 통화 내용과 관련, "L부사장에게 분담금을 내는 게 어려운 것인지, 부스나 행사 전체에 참여가 어려운 것인지를 확인했다"며 "한번 챙겨봐 줄 수 있으면 챙겨봐 달라고 했다"고 밝혔다. 이 임원은 그 뒤 해당 계열사에 간곡히 요청했으나 계열사가 예산 배정이 어렵다는 당초의 입장을 고수, 분담금은 제공되지 않았다고 양 비서관은 말했다. 그날 행사 비용은 정부와 방송사의 출연금, 방송위의 방송 발전기금 등으로 전액 충당됐다. 3개 기업 중 유독 삼성의 임원에게만 전화한 것에 대해 양 비서관은 "대표적인 업체가 출연을 안 하면 어렵다고 판단, 여타 기업에는 전화를 걸지 않았다"고 했다. 또 기업체별 분담금 예상액에 대해 그는 "억대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양 비서관은 이날 오전 인터넷신문 '이데일리'에 관련 기사가 난 뒤 확인을 요청받자 "행사 참여를 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전화했으나 답신이 없어 해당 임원과 통화하지 못했다"고 거짓말을 했었다. 그러나 그 후 양 비서관은 노 대통령이 전화를 직접 걸어 사실관계를 물어보자 실토했으며 대통령한테 질책받은 뒤 청와대 기자실을 찾아 이 같은 사실을 공개했다.

양 비서관은 "최대한 깍듯이 예우를 갖춰 기업 임원에게 전화했다"고 설명했으나, 기업의 입장에선 청와대 주무 비서관의 전화를 압력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에서 파문이 쉬 가라앉지는 않을 것 같다. 언론노보 기자 출신인 양 비서관은 국내 언론비서관 시절 "저주의 굿판을 집어치워라"며 조선.동아일보를 비판, 화제가 됐으며 최근 홍보수석실의 선임인 홍보기획 비서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산자부는 삼성.LG에 요청=한편 산자부 관계자는 "산자부가 방송위의 부탁을 받고 삼성과 LG 쪽에 행사를 공동 주최할 수 있는지 문의한 적이 있으나 해당 업체들은 이를 거절했다"고 말했다. 그는 "통상 정부 주최 행사에서 예산이 부족할 때 관련 기업에 참여 의사를 타진한다"며 "기업들이 싫다고 하면 강요할 수 없는 일 아니냐"고 했다.

최훈 기자 <choihoon@joongang.co.kr>
사진=최정동 기자 <choijd@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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