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대기업 경험, 중소기업에 큰 도움 되네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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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 퇴직 이후 오랜만에 보람된 일을 해봤습니다. 전문 인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중소기업에서 25년의 대기업 직장 경험은 큰 약이 되더군요.”

한국IBM에 근무하다 2002년 퇴직한 정종영(58·사진)씨는 올 9월 한국전자거래협회가 마련한 ‘대중소 상생IT혁신사업’에 경영 컨설턴트(IM)로 참가해 중소기업의 전산 컨설팅을 하고 있다. 그가 이달까지 석 달 동안 받은 컨설팅 비용은 2500만원 정도. 적은 돈은 아니지만 무엇보다도 그에게 값진 것은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복귀다. 이 비용은 전액 협회에서 지불한다.

그는 1978년 동아대 수학과를 졸업하고 연합철강과 한국중공업 전산실에 근무하다 84년 한국IBM으로 옮겨 18년간 일했다. 퇴직 이후에는 생산관리 및 경영혁신 관련 컨설팅을 해주는 프리랜서로 활동해 왔다. 고정적인 수입은 아니었지만 한창 일해야 할 50대 초반에 등산만 다니기에는 넘치는 열정이 문제였다.

그가 이번에 컨설팅을 해준 회사는 현대·기아차에 납품하는 2차 부품업체다. 그는 “대기업의 납품 가격에 100% 의존해야 하는 2차 부품업체는 자체적인 생산시스템조차 갖추기 어려운 환경”이라며 “매년 납품 가격을 인하하는 구조개선이 가장 시급하다”고 조언한다. 이어 “소형 컴퓨터(서버)로 구축한 초기 생산시스템을 대기업 전산망과 연결해 실시간으로 주문을 연동하는 생산시스템으로 바꾸는 것이 1차적으로 해결할 점”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특히 자동차 회사들이 재고를 최적화하기 위해 도요타에서 벤치마킹한 적기생산방식(JIT)을 협력업체에 요구하고 있는 것을 문제점을 꼽았다. 이는 재고부담을 협력업체에 떠넘긴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 제대로 JIT를 운영하려면 매일 또는 일주일 동안 몇 개를 생산해야 하는지 감을 잡을 수 있는 주문의 평준화가 선결요건이라는 것이다.

한국전자거래협회는 올해 하반기부터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상생 협력을 위해 전산 및 경영 관련 전문 퇴직자(IM)를 중소기업에 연결해 주는 대중소상생IT혁신센터를 지식경제부 지원 아래 운영하고 있다. 대기업·중견기업과 중소 협력업체가 컨소시엄을 구성해 설계·생산·물류 등 협업이 필요한 분야의 정보기술(IT) 시스템을 구축하는 게 목적이다. 아직까지 국내 중소기업의 정보화 수준은 대기업의 70%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더구나 정보화 추진 전문인력 부족률이 54.4%에 달하는 등 개선의 여지가 많다.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생긴 것이 IT혁신단이다. IT혁신단에서는 중소기업의 정보화 담당자와 정씨 같은 200여 명의 IT 및 해당 업종 전문가가 함께 일하고 있다. 이번 사업에는 현대·기아차와 협력회사 96개사를 비롯, IHL·DBI·삼성전자·삼화전기·대우조선해양과 이들 협력업체 200여 곳이 참여했다. 한국전자거래협회 김신구 상생혁신TF 팀장은 “그동안 대기업이 정부와 여론의 눈치 보기식 상생 사업을 전개할 때마다 중소기업은 반신반의하면서 수동적으로 참여한 데다 정책 집행부서도 일관성이 결여된 경우가 많았다”며 “이번 사업은 이런 문제점을 극복하는 시발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씨는 “이번 상생 프로젝트가 경제위기를 탈출하기 위한 일회성 사업에 그치지 말고 협회나 정부기관에서 경험 많은 전문 퇴직자 네트워크를 구축해 인력난을 겪고 있는 중소기업에 연결해 주는 다리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어느 정도 경제력을 갖춘 실버 인력들이 자원봉사 차원에서 일하면 월 보수는 100만∼150만원이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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