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Where를 Now Here로 읽어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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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호 10면

여기저기에서 ‘융합’을 말한다. 그 속에 길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융합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어떻게 합친다는 것인가. 경기도 수원 광교테크노밸리에 자리 잡은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원장 최양희)이 이 쉽지 않은 질문에 대답을 마련했다. 4일 시작한 ‘융합포럼’이다. 연구원과 대학원생은 물론 일반인까지 대상으로 하는 교양강좌다. 과학기술 및 인문사회·예술에서의 융합 패러다임을 쉽게 풀어보자는 취지다. 첫 강사는 『디지로그』의 저자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에서 융합을 말하다

그는 선마이크로시스템스를 공동 창립한 빌 조이의 말을 빌려 통찰력 없는 기술의 결합이 가져올 위험에 대한 지적으로 강연을 시작했다. “빌 조이는 나노테크놀로지와 로보틱스와 유전공학이 합쳐지면 사람도 기계도 아닌 것이 반드시 태어난다고 경고했죠. 죽기 싫은 사람들은 자신의 기억정보를 포함해 모든 것을 기계에 다운받으려고 할 것이고, 이게 결국 인간이 망하는 길이라는 거죠.”

그 비슷한 상상이 이미 문학에서는 실현됐다. 프랑켄슈타인이다. 이 전 장관은 이 대목에서 농담 같은 화두를 슬쩍 던졌다. “무서운 것은, 모르면서 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흔히 프랑켄슈타인이 괴물인 줄 아는데, 사실 괴물을 만든 박사 이름이죠. 또 이 소설을 쓴 사람은 여자(M W 셸리)입니다. 생명 탄생이라는 여성의 영역을 침범하려는 남성의 욕심에 대해 일침을 가한 것이죠. 과학을 맹신하면 불완전한 괴물이 탄생한다는 경종입니다.”

최근 신종 플루(인플루엔자A/H1N1)가 이슈가 되고 있는데, 바이러스나 기생충 등의 몰살이 오히려 신종·변종 바이러스의 원인이 되고 있다. 바이러스와 기생충이 해가 되는 것만은 아니며 이들과도 공존하고 융합할 수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고 그는 말했다.
학문이 원래 ‘배운 것(學)을 물어보는(問)’ 것이라고 할 때, 융합이라는 새 학문의 방향성을 과연 어디서 찾아야 할 것인가. 이 전 장관은 “그것은 바로 자연”이라고 강조했다.

인간의 모든 기술은 폐기물을 전제로 한다. 하나를 만들기 위해 아흔아홉 가지 쓰레기를 만든다. 하지만 자연은 배설물을 만들지 않는다. 서로 영향을 주며 완전한 리사이클링 구조를 이룬다. 여기에 해법이 있다는 것이다.

“자연의 오묘한 시스템에서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는 열쇠를 찾으려는 연구를 ‘바이오미미크리(Biomimicry·생체모방공학)’라 합니다. 동물과 식물과 미생물의 조화로운 삶 속에서 인간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비밀을 찾는 것이죠. 근대 과학기술이란 게 200년도 채 안 되거든요. 38억 년을 살아온 생명의 진화과정에 신기술의 원천이 있습니다. 지금 선진국에서는 바이오미미크리에 대해 치열한 연구를 하고 있어요.”

자연을 본받자는 바이오미미크리에서는 지금까지의 인식이 물구나무를 선다. 인간을 괴롭혀 박멸의 대상인 모기가 첨단 나노기술의 스승이 된다. 일본에서는 벌써 모기의 침을 모델로 하는, 아프지 않은 주삿바늘이 개발됐다. 신축성과 인장력이 뛰어난 거미줄에 사용된 방법을 응용해 방탄조끼나 외과수술용 실을 만들어 내고 있다. 영국 맨체스터대학에서는 벽에 달라붙는 도마뱀류의 발바닥 모양을 분석해 강력 접착테이프를 만들어냈고, 건조지대인 사바나에서 30도를 유지하고 있는 흰개미 집을 연구해 냉방장치가 필요 없는 빌딩을 세운 건설회사도 등장했다.

“바퀴벌레는 체내 미생물을 통해 어떤 배설물도 밖으로 내보내지 않죠. 제대로 씻지도 않을 텐데 껍질은 어찌 그리 반짝이는 걸까요. 하찮게 보이는 바퀴벌레에 21세기 환경과 경제를 아우를 수 있는 비밀이 담겨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 전 장관은 모든 것을 구분하고 나눠온 서양과 달리 동양의 통합적 시각이야말로 우리가 활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국기만 해도 그래요. 유럽에는 직선이 많습니다. 하지만 아시아 국가들은 원을 많이 사용하지요. 우리 말에 ‘별 게 아니다’란 말이 있죠. 나누지 말라는 의미죠.”

바람은 들어오게 하고 모기는 못 들어오게 하는 모순을 하나에 구현한 방충망, 쓰는 기능과 지우는 기능을 통합한 지우개 달린 연필처럼, 모순과 갈등의 통합적 구현이야말로 새로운 세계를 열어 주는 열쇠가 될 것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해답은 어디에도 없다(NO WHERE)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여기 있다(NOW HERE)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띄어쓰기 차이가 아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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